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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 봉황새작전 호국영령 추모 대 천도법회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9. 2. 7. 17:53

 
  
  한라산 봉황새작전 순직 53인 망자 추모 천도제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9. 2. 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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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주기 한라산 봉황새작전 산하 호국영령 추모 대 천도법회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9. 2. 5.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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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한라산 봉황새작전 추모 천도제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9. 2. 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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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주기 한라산 봉황새작전산하 호국영령 추모 대 천도법회

오늘 날씨가 참 따스했다.
여러가지로 준비가 소홀하고 부족했지만 유가족이나 선배님들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내년에는 조금더  좋은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부디 좋은곳으로 극락왕생 하소서.

 
  
  24년간 정신병 앓은 제3공수 여단원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3. 12:06
24년간 정신병 앓은 '제3 공수여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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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이야기☞ | 2006/05/14 (일)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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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간 정신병 앓은 '제3 공수여단원'


<특별기고> '박하사탕'을 아직 곱게 간직하고 있는 내친구 김동관



이 글은 오는 14일 오후 11시30분 방영되는 MBC의 '5.18 특집기획 다큐' <내친구 김동관>에 출연한 필자가 지난 3월중순부터 4월말까지 동행 촬영한 후 쓴 특별기고다.

특집 다큐의 주인공 김동관씨는 1980년 5월20일 오전 7시 제3공수여단의 일원으로 전남대에 투입돼 진압작전에 참여했다. 김씨는 그후 24년여 동안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수도권에 있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현재 수원 아주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는 1980년 광주에서 그가 무엇을 보고 행하고 느꼈는지를 사건 발생 26년만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필자는 이 다큐에 출연하는 주인공 김동관씨의 대학입학 동기로서 지난 1977년이후 지금까지 30년간 주인공을 곁에서 계속 지켜본 절친한 친구 중 한명이다. 이제까지 광주시민, 민주열사 등 승자의 시각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이 조명되어 왔다. 하지만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공수부대원이 광주 진압후 얼마나 악몽같은 삶을 살아왔는가를 통해 광주항쟁의 본질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내 친구 김동관

어김없이 찬란한 5월이 또 왔다. 5월 광주민중항쟁,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완성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쟁취한 시민혁명이건만 그 속엔 텅 빈 구석이 넓기만 하다. 아직 공허함이다.

나에게는 친구가 있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7년 3월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에 입학한 동기생이다. 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 우리는 조국통일과 민주주의에 대해 고뇌했다. 그 이름은 김동관.

그 당시 고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고전연구회라는 이념 서클이 있었다. 동관이와 나는 이 서클에 가입했다. 지금은 우습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칠흙같이 암울한 독재정권 시절 학생운동은 투쟁의 방법론을 놓고 치열한 내홍을 겪곤 했다. 학내 시위가 잇따랐고 비교적 온건론을 편 김동관과 나는 이듬해인 78년에 서클에 이름만 걸쳐 놓는 상태가 됐다.



△ 대학재학 당시 친구들과 포즈를 취한 김동관. 사진 왼쪽부터 김우진, 김동관, 그리고 필자. ⓒ 황남준



그는 1979년 5월 23일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다. 운동권 경력을 가진 그는 공수부대원으로 차출돼 거여동 제3공수 여단에서 공수 훈련을 받았다.

1979년 9월 초순 서울 송파구 거여동 제3공수 면회실. 이찬영, 김우진, 나(이상 대학동창), 이원호(중학교 동창) 등 네 사람은 동관이 녀석 먹일 닭튀김과 음료수 등을 싸들고 면회를 갔다. 우리는 조금 걱정했다. 곱게 커온 녀석이 논산훈련소를 거쳐 험하기로 악명높은 공수훈련까지 잇따라 받았으니 거의 초죽음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녀석은 의기양양한 자세로 우리를 반겼다. 자신이 공수부대원의 우상인 ‘막타워의 왕’이 됐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막타워', 그것은 비행기 낙하훈련을 하는 모형탑을 가리킨다.

"네 번을 제일 먼저 합격하는 사람이 왕이 된다. 막타워의 왕. 그게 나라고. 그러니까 네 번... 아니 다섯 번을 뛰었다. 네번째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너무 자신만만하게 뛰어가지고··· 그래 한 번 더 올라갔어. 그래 뛰니 합격이지 뭐. 그러자 조교가 오더니 군복 다 벗어라 이거야. 그리고 막걸리 한 독을 떡 갖다놓는 거야. 한 주전자 퍼가지고 딱 먹이고.

막타왕이 (특전사) 최고의 영예야. (동료들은) 다 훈련받고 얻어맞고 뺑뺑이 돌고 있는데 막걸리 마시고 있는 거야, 혼자서. 군복 아래 위 다 벗고 군화 끈 다 끄르고, 군용 팬티만 입고 말이야."

그러던 동관이 입대 1년후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하자 제3공수여단의 일원으로서 진압군으로 전남대에 투입됐다. 이것이 이 젊은 청년을 절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하는 계기가 될 줄이야.



△ 공수부대 시절의 동관이. ⓒ김동관


달라진 동관이

5.18광주민주항쟁이 무참히 진압된 직후인 1980년 후반의 일이다. 동관이는 외박과 외출을 나와 학교 근처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길거리에 있는 군인들과 시비가 붙어 곧잘 싸우곤 했다. 주로 동관이가 먼저 말을 붙이고 서로 주먹다짐이 오가는 식이었다. 우리는 녀석의 달라진 모습에 너무 놀라곤 했다. 군대가기 전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러던 중 1981년 여름 어느 일요일 오전. 나는 9월 입영날짜를 받아놓고 서울 도봉구 수유2동 도성암이라는 절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동관이 어머님이 잠시 집에 와서 점심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주셨다.

청파동에 있는 동관이 집으로 갔다. 동관이는 외박을 나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후에 귀대 예정이었다. 동관이 아버님이 따로 부르셨다. "동관이가 혼자서 중얼거리고 자주 화를 내고 잠자다 괴성을 지르는 등 무언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셨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어떨까 궁금해서 불렀다는 것이다.

동관이는 나를 반겨하면서도 표정이 밝지 않았다. 대화도중 하느님과 예수님을 가끔 언급하다가 가끔 언성이 높아지는 등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모처럼만에 갈비찜 등 푸짐한 고기음식을 많이 내주셨다. 동관이가 몸이 허해 가끔 헛소리를 하는 것 같으니까 고기를 많이 준비하셨단다.

"제대를 앞두고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서 그럴수도 있겠지요"라는 말로 위로의 말씀을 건넸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관이 부모님이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걱정이 되길래 나를 부르셨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당시 정신병이라는 것은 패가망신하는 병으로 인식된 만큼 "내 아들이 그런 병에 걸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동관이 어머님은 회고하신다.

동관이는 1981년 11월5일 제대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982년 봄 정신분열증으로 고대 근처 베드루 병원에 한달간 입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생의 절반이 되는 24년동안 전국의 정신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병명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등 정신분열증이었다.

광주의 참극, '특전사의 무차별 학살'

도대체 1980년 5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20여년간 필자 등 몇몇 지기들에게만 파편적으로 당시 참상을 말하던 그가 비교적 건강상태가 양호해진 최근 필자가 동석한 가운데 MBC 등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밝혔다.

진압군 최후의 보루, 정예중의 정예인 제3공수여단의 일원이었지만 그는 시민군에 결코 총을 겨누지 않았다 했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광주시민과 대학생들의 원통한 고통과 죽음에 대해 강렬한 몸짓으로 상관들에 항거했다 했다. 실제로 그는 “전두환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81년부터 술을 한 잔 걸치면 입에 달고 살았다. 또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중 유독 악랄하게 시민군을 살해한 하사관들에 대한 적개심을 달래지 못하고 병영내에서 이들 하사관과 격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한다.

"명령은 데모대 중에서 무장한 경우에만 사격을 하게 돼 있었어. (그런데) 얘들 특전사 요원 애들은 무차별 사격했다고, 무차별로. 내가 그걸 봤어. 무차별 사격을...
'서!' 그래서 안 서면 그냥 쏴 버렸어. 무장을 했건 안했건. 도망가면 무서워서 도망가면. 그걸 쏴 죽였어. 이 특전사 애들이. 그러니, 무차별 학살이지 무차별 학살...
나는 광주 시민을 쏘는 특전사를 쏴 죽일라 그랬단 말이야. 근데 그걸 차마 죽이진 못하고..."

"전남대에서 광주 교도소로 이동했을 때 일이야. (시위대가) 탈취해 온 버스가 있었는데 문이 안열려서 문을 억지로 빵 쳐서 열었더니, 운전수가 총을 맞았는데 의자가 뒤로 딱 제껴져 있었어. 운전수가 딱 누워있는데 살아있었어. 그런데 눈에 총알을 맞았어 눈에... 심장은 뛰더라고, 만져 보니까.

버스 앞에는 전부 총알 구멍이야. 총알이 눈에 맞았는데 심장은 살아있고. 그때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몰라.
그걸 어디 묻을 수도 없고, 살아있으니까. (그때만 해도) 암매장한 게 많아, 시신 암매장 한 게...묻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 그래서 운전수를 나무 밑에다가, 그 전남대 산 나무 밑에다가 들어다가 놓고 왔다고 그냥. 살아있으니까. 치료해 줄 수는 없고...그후 이동했는, 그 때 참 처참하더라고.
그 때 전두환이를 죽여야 되고 노태우도 죽여야 되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
매일매일 (그) 생각하면 술이 안 끊어지는 거야 술이. 슬퍼서... 복수를 해야겠다고 불타는 게 아니라 슬퍼서. 그게 슬퍼서 그들의 죽음이 슬퍼서..."



△ 광주민중항쟁을 진압 중인 공수부대원들. ⓒMBC



광주에서 성남 거여동 제3공수여단 본부로 복귀한 뒤에도 그는 광주참살에 관여한 상사들과 부단히 부딪쳤다.

"내가 술을 먹을라고 남한산성으로 보고를 하고 올라갔어. 거여동에 그 뒷산이 남한산성이었거든요. 거길 올라갔는데 늦게까지 안 오니까 상사인 박OO 중위가 탈영보고를 올렸어. 잡으러 올라와 끌려내려갔지. 두드려 맞고.

화는 났지. “박중위 나와” “내가 보고하고 올라갔는데 너 왜 탈영보고 올렸니”
박중위는 분명 부관실에 있는데 안나오더라고. 그래도 계속 “박OO이 나와" 이러니까 “이 새끼”하고 권총을 딱 들고 나오더라구.

권총을 들고 나오니까 그 때서야 아차 싶더라고. 그래서 그은 거야(왼 손목을 가리키며) 특전사는 이렇게 한 번 자해를 하거나 하면 그냥 지나가. 특전사가 워낙 험악하게 훈련을 받고 험악하게 하기 때문에 ··· 그래 이걸 그어버린 거야. 필름 끊어져서 엄청 취해가지고. 기억이 나는 게 네 바늘 꿰맸는데. 세 바늘째 따끔따끔해서 보니까 의무관 중사가 꿰매고 있더라고. 그래 가지고 일주일을 쉬었어.
중사, 저 애들하고 사이는 좋았는데, 술 먹으면 많이 싸웠어. 왜냐면 이 새끼들이 죽였거든."

탈영보고 사건후 동관이는 엄청나게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아마 그의 병세는 탈영보고 사건과 이에 따른 자해사건, 이후 살인적인 기합과 구타 등이 잇따르면서 5.18 광주 출동후 잠재해 있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표면화된 것으로 보인다.

광주 민중항쟁에서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총부리를 겨눈 하사관들과의 잦은 충돌, 살인적인 구타와 집단적인 따돌림, 탈영보고와 자살기도 등··· 고귀한 영혼과 여린 가슴을 지닌 그에게 역사의 질곡과 지옥같은 병영생활은 너무 버거웠던 것일까. 자책감과 분노감을 이기지 못하다 끝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끈을 놓아 버렸다.

부친 홧병으로 돌아가시고 24년간 정신병원 전전

동관이는 제대후 복학과 휴학을 반복하면서 정신병원 신세를 졌다. 1980년대 그가 입원한 병원만 경희의료원, 강남 성모병원, 고대 병원, 용인정신 병원 등 즐비했다. 당연히 직장을 잡을 엄두를 낼 수도 없다. 특히 이 병에 대한 무지와 정신병에 대한 일반의 냉소적인 인식 등이 겹쳐 동관이는 정신병의 초기 치료에 실패한다.

평소 간경화병을 앓으시던 부친께서는 금지옥엽처럼 키운 아들이 몹쓸 병을 얻어 처절하게 망가진 모습을 보고 가슴이 미어진다. 1983년 12월 홧병으로 피를 토하고 돌아가신다.

82년 봄 복학을 한 동관이는 이듬해부터 휴학, 정신병원과 복학 등을 거듭한 끝에 85년 가을 가까스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동관이가 정상적으로 학점을 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배광복(현재 통일부 근무)과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의 도움과 친구 아버지인 이준범 전 고대 총장님의 배려가 있었다.

그에게도 잠시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1991년 3월 이OO씨와 결혼한 것이다. 교회에서 만나 주위의 도움으로 인연을 맺었다. 신접 살림을 신림동엔가 차렸는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모처럼만에 찾은 정신적 육체적 평온의 시절은 그러나 1993년 아들 OO의 출생 직후 음성정신병원에 장기간 입원함으로써 마감하게 된다.

신혼생활중에도 반포에 있는 용인정신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았지만 환청과 음주, 폭언과 폭행 등이 잇따르면서 상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를 반기는 곳은 이제 정신병원뿐이었다. 결혼 11년이 다되어가는 2002년 2월 동관이는 아내와 아들의 평화를 위해 합의이혼을 했다. 그러나 두 사람간의 신뢰와 애정은 아직 애뜻하다. 아니 사랑의 끈은 아직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다. 전 부인은 아직까지 동관이의 입원비의 일정부분을 보태며 아들을 튼튼하게 키우고 있다. 동관이도 내심 자신의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염치가 없어서인지 내색을 안 하고 있다.

동관이는 요즘 이혼 당시보다 훨씬 건강상태가 양호하단다. 이혼후 국립춘천병원에서 잘 처방된 약과 자신의 강력한 재활의지 덕택이다.



△ 아주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 김동관(오른쪽), 동관이 모친 김영순 여사, 그리고 전성. ⓒMBC



동관의 친구들

지난 2004년 사법고시에 늦깍이로 합격해 현재 사법연수원에 다니는 전성 예비변호사도 동관이와 같은 서클 출신이다. 그는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감옥생활을 했고 그후 줄곧 재야와 진보 정치운동권에서 자라왔다.

그는 의협심이 강하다. 추진력도 보통이 아니다. 이찬영과 김원갑, 김우진과 나 등 주위의 친구들이 김동관의 처지에 대해 안타까워 할 때 그는 혜성처럼 나타났다.

친구들은 지난 98년 동관이의 아내 이OO씨와 머리를 맞대고 동관이에 대한 명예회복과 군복무중 공상을 입은 군인으로 국가의 보상을 받을수 있도록 법적인 해결을 추진했지만 사회적-행정적-사법적인 장벽에 가로막혀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이제 전성이가 나타나 새로운 힘을 얻고 있다.

전성이는 MBC측에 자신의 방송 아이템을 제시했고 이는 김영호 PD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 김 PD는 베트남 병사들의 전쟁 후유증에 관한 다큐를 제작하는 등 전쟁의 파괴성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방송인이었다.

이찬영과 김원갑은 MBC가 촬영 작업이 들어갈 때 방송국과 친구들, 그리고 친구들간의 가교 역할을 자원하며 바쁜 직장생활 와중에 시간을 쪼개어 동관이를 위해 진한 우정을 발휘하고 있다. 김동관이 이처럼 많은 친구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아직까지 받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대양같은 마음을 품고 육대주를 누비겠다”던 호연지기와 주위사람들에게 너그럽고 자상하게 대해주는 따뜻한 인간 됨됨이를 30년이 다되도록 친구들이 아직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에필로그

내 친구 동관이의 이야기는 지난 2000년 상영된 또 다른 한편의 <박하사탕>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두 주인공이 걸어간 길은 정반대다.

영화속 주인공 김영호(설경구 분)가 가학적이라면 김동관은 자학적이다. 김영호가 타락했다면 김동관은 박하사탕처럼 순수하다. 김영호는 박하사탕을 짓이겨 으깨버렸지만 김동관은 박하사탕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영화속의 김영호는 5월 광주 민중항쟁 발발시 갓 자대에 배치된 신참 육군 이병으로 진압작전에 투입됐다가 칠흙같이 어두운 밤 여학생을 총기 오발 사고로 죽이게 된다. 이 사건은 김영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그는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인물로 변한다. 제대 후 경찰에 투신한 그는 시국사범을 체포해 무자비한 구타와 물고문 등을 자행하는 전형적인 악질 형사로 변한다.

94년 10년간의 형사생활을 청산하고 가구점 사장으로 화려한 변신한다. 그도 잠시. 주인공은 가정 파탄과 잇따른 사업 실패로 폐인이 된다. 99년 가을, 첫 사랑 윤순임(문소리 분)을 암으로 보낸 3일 뒤, 철길위로 올라가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마주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내친구 동관이는 박하사탕의 주인공과 다른 길을 걷는다. 김영호처럼 어엿한 사회생활을 하며 역사에 대한 분풀이라도 해봤으면 덜 후회스럽겠건만. 바보같은 그는 그저 정신병원을 전전할 뿐이다. 그 과정은 자신의 가정과 부모 형제와의 파탄의 연속이다. 역사적 질곡을 조그마한 가슴에 묻은 채 촛불처럼 스스로를 태운다. 그리고 어느 덧 쉰 살이 다 됐다. 이제 우리 사회가 그의 고통에 답할 때다.

[2006-05-12 09:57:48 황남준 한국금융연구원 초빙연구원]

조 항조 / 사나이 눈물


 
  
  5,18묘역의 양극화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3. 12:01
5.18묘역의 양극화
조회 (166)
광주 5/18 이야기☞ | 2006/01/15 (일)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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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묘역의 양극화      



새해,5.18구묘역과 신묘역을 가다

2006년 새해벽두에 노무현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새해에는 서민 여러분의 형편이 한결 나아질 수 있도록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밝히고, “그동안 우리의 발목을 잡아왔던 큰 문제들은 이제 대강 정리된 것 같아, 올해에는 좀더 차분하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새해맞이의 자신감을 밝혔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해찬 국무총리 역시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 “정부는 올해 양극화 해소, 고령화 대책에 주력할 것”이라며 “경기가 활성화 되고 있어 국민이 골고루 따뜻한 온기를 느낄 시점이 멀지 않았다”고 말해 노무현대통령의 신년사를 뒷받침했습니다.

참여정부의 국정운영방침이 발표된 그 이튿날, 국립5.18묘지를 찾았습니다. 새해를 맞아 마음가짐도 하고 오랫동안 찾아가지 못했던 5.18구묘역에 자리잡은 열사들의 묘도 참배할겸 해서입니다. 80~90년대 야만의 시절 때에는 자주 찾아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곳이기도 해서 사뭇 각별했습니다.



▲ 눈이불을 뒤집어 쓴 듯 음산한 5.18구묘역. 깃대에 태극기가 힘없이 걸려 있습니다.


먼저 구묘역을 가보았습니다. 눈은 아직 녹지 않았습니다. 마치 눈이불을 뒤집어 쓴 듯 고요하기만 합니다. 빛바랜 태극기가 힘없이 걸려있습니다. 눈은 치워지지도 않았는지 발목까지 빠져들고 병술년 ‘개띠’라서인지 개발자욱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 병술년 개띠해입니다. 눈덮힌 묘역에 개 발자욱이 선명합니다.


무명열사와 민주열사의 묘비에는 아직도 붉은 띠가 동여매져 있습니다. 아침나절인데도 스산하기만 합니다.



▲ 80년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했던 박관현열사의 묘도 보입니다.(신묘역 이장)


80년 5월 속에 광주시민과 시민군은 손수레와 청소차에 실려 이 곳에 묻히고, 그 뒤 지독했던 야만의 시절에 의문의 죽임을 당해서, 또는 제몸을 스스로 불살라 제단에 몸을 바친 민족민주열사들이 묻여있는 이 곳은 한 때 광주정신을 웅변하던 민주화의 성지였던 곳입니다.



▲ 조선대교지 "민주조선" 창간호에 북한의 혁명과 건설, 미제침략사 등을 실어 국가보안법에 연루, 수배를 받다 의문의 주검으로 돌아온 이철규열사의 묘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몇몇 뜻있는 사람들만 이 곳을 기억하며 다녀간 듯 한산하기만 합니다. 막걸리를 마시며 약해질세라 마음세우며 목놓아 울던 이 곳은 지금 어쩌면 천덕꾸러기처럼 방치되어 있는 듯 합니다.



▲ 눈에 파묻힌 무명열사의 묘비.


열사들의 묘를 둘러보고 신묘역을 향했습니다. 그런대로 빙판눈길도 잘 치워져 있고 추모의 노래소리가 들립니다. 100여명의 군중이 추모하러 가는 대열이 눈에 들어옵니다.



▲ 1백여명의 무리들이 5.18신묘역 참배단을 향하고 있습니다.


따라가 보니 열린우리당 광주전남시도당 당직자들이 지역 국회의원들과 함께 새해참배를 하러 가는 대열입니다. 가보니 장엄한 추모곡이 울려 퍼지고 참배가 시작됩니다. 참배단에는 노무현대통령과 이해찬총리, 김원기 국회의장의 추모화환이 서있고 민주당의 대표화환도 함께 있습니다.



▲ 자세히 보니 열린우리당 지역국회의원과 당직자들이 참배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 ‘열린우리당 당직자일동’의 화환이 놓입니다. ‘대표’들의 화환 옆에 ‘일동’이라는 표현이 사뭇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웅장한 추념의 탑과 가지런이 정비된 신묘역, 국립 5.18묘지는 구묘역과는 확연히 달라보입니다.



▲ 노무현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의 추모화환이 보입니다.가운데 서있는 사람은 박경순 5.18국립묘지관리사무소장

신묘역은 구묘역으로터 탄생된 것입니다. 갑자기 ‘조강지처’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공원같은 신묘역과 음산해보이는 구묘역! 아마도 조강지처는 구묘역같은데 조강지처는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에는 아직도 오늘의 참여정부가 있기까지 자신의 청춘과 온몸을 던진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인데도 5.18의 직접적인 관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너무 가혹한 것일까요?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 수많은 추모객들이 이 곳 5.18국립묘지(신묘역) "민주의문"을 거칩니다. 5.18구묘역에도 민주의 새해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것도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양극화’일까요? 양극화해소에 집중하겠다는 참여정부의 국정운영방침이 발표된 그 이튿날, 5․18묘역에도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숙제가 남아있음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최향동 / 기획위원]


♪The John Dunbar Theme / John Barry ♬


 
  
  며느리도 모르는 5.18 표지석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3. 11:58
며느리도 모르는 '5·18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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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이야기☞ | 2005/12/12 (월)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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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도 모르는 '5·18 표지석'     


추상화된 형상과 깨알같은 글씨로는 현장감 느낄 수 없어

미국 워싱턴 D.C. 에 유대인 학살을 추모하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다. 일년에 수백만명이 왔다간다. 규모는 우리나라 초등학교보다 적다. 그런데 이 건물을 들어갔다 나온 모든 사람들은 눈에 눈물자국을 다 갖고 나온다. 나치의 학살과 유대인의 비극적 삶을 그 작은 건물 안에 모두 다 기록하고 형상화 시켜 역사를 현재로 재생해서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유대인의 비극적인 역사를 공유하며 슬픔과 분노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25년 전 5.18민중항쟁의 현장이었던 광주 속 기념물들은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동시장 사적지 표지석 부근에서 만난 한 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 5.18민중항쟁 표지석. 양동시장.

“광주는 무능 하제 잉. 여그 와봤자 5.18이 뭔지도 몰라붕께 무능한 것이제. 그때 어렸던 학생들이나 한 두 살 먹었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김밥 싸고 주먹밥 만들고 집집마다 밥 맨들어서 시민군 트럭에다 갖다 날렀는지 뭣으로 알것소. 아, 사진 때기 하나라도 놔두면 훨씬 낫 제. 그때 사진 하나라도 설치하믄 백번 말이나 글이 뭔 필요하것소. 답답해브러. 글로 표시된 비석마저 저 공중 전화박스 옆에다가 천으로 저렇게 덮어 있으믄 뭣인지 알것냐고. 안된당께 광주는. 뭣이 빛의 도시여 도시는, 껌껌한 도시제.”

“뭣이 빛의 도시여, 껌껌한 도시제”



▲ 도청 부근.

항쟁의 중심공간인 도청의 경우도 양동과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학습을 통해서 5.18을 배워야 하는 고등학생들에게 사적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래는 고등학생과 나눈 대화다.

“애들아 이 비석 같은 게 뭔지 알겠니?”
“아니요, 모르겠는데요.”
“몇 학년?”
"고 2예요. 5.18에 대해 학교에서 배웠는데요. 근데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몰라요. 이곳이 5.18 때 유명한 도청 앞인지 아저씨가 말항께 쬐금 알겠네요. 저렇게 분수대만 달랑 있으믄 뭣을 알겠어요. 뭔가 조각이든지 동상이든지 그때 사진이든지 있어야제 여기가 유명한디구나 하고 한번 이라도 더 생각하고 이곳이 5.18 일어나고 광주 시민들 엄청나게 고생한디구나 하고 알제 이렇게 생겼는데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어떻게 뭣으로 알겠어요!”



▲ 주남마을 입구.

광주-화순간 국도변에 있는 ‘주남마을 학살 표지석’은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했다. 시속 80킬로 이상 달리다가 표지석을 보기 위해 멈춰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주차공간을 마련하던가, 아니면 이곳 상황에 맞는 조각이나 사진, 혹은 형상화된 상징물을 세우는 게 더 타당할 듯싶다. 실제로 마을에서 만난 한 촌로는 “우리 동네는 5.18 비석이 없다”고 단정하기까지 했다. 촌로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다. 추상화된 구조물에 깨알 같은 글씨로 표시해뒀으니 그게 5.18비석인줄 어떻게 알겠는가.

5.18민중항쟁 표지석 대부분 “모른다”

항쟁의 진원지인 전남대학교, 그리고 숱한 시민들이 고통을 당한 조선대학교에서도 표지석은 무용지물이었다. 전남대, 조선대에서 대학생.시민과 나눈 대화를 순서대로 적었다.



▲ 전남대 정문.



▲ 조선대학교

“몇 학년 이세요?”
“전남대 1학년이예요.”
“이곳이 5.18 첫 격돌이 일어난 곳인줄 아세요?
“네.”
“그럼 저기 보이는 표지석이 무언줄 아세요?”
“아니요.”
“아주머님 전대 자주 산책하세요?”
“네.”
“저 비석같은게 무언지 아세요?”
“아니요.”
“5.18 표지석인데요.”

“아 네에. 근데 왜 저렇게 안 보인데다 세워뒀단가요. 이쪽 정문에다 놔두면 훨씬 잘 보이고 좋을텐데...”
“돈이 아깝네요. 유심히 쳐다보지 않고서는 이것이 5.18을 나타내는 표지석이라 누가 생 각하겠어요. 사진은 고통스러우니까 조형물이라도 착 보면 바로 알 수 있게 해서 그날을 기려야 하지 않나요. 비용이 아깝네요. 다시 말하지만 지나가다 누가 이게 5.18 표지석이라 알겠어요. 글자도 잘 안보이는데.”


(조선대에서 만난 시민, 이하 학생)
“이 표지석 무언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실례지만 몇 학년이세요?”
“3학년이예요.”
“말씀 해주셔서 고마워요.”

상무관, YWCA, 농성광장 격전지, 광목간 양민 학살지 등등 한번 어디에 있나 살펴보면 우린 어떤 심정이 들까 한다. 그리고 그 주변을 걷는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게 무엇인줄 혹시 아세요 하고 물어보면 한결같은 답이 나올 것이다.

“모르겠는데요”

표지석 모두를 살피고 난 뒤에 말로 설명하기엔 힘든 그 무언가가 숨막히도록 가슴을 내리 눌렀다. 다름 아니라 국가폭력의 야수적 만행과 살육에 맞서 온몸으로 싸우다가 산화했던 광주, 기억과 재생으로 반드시 계승 승화돼 민주 인권 정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공동체의 활화산으로 부활할 5.18을 웅변하고 있는 이 모든 현장에 표지석 외엔 어떤 조형물도 형상물도 사진 한 장도 없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기억’하고 어떻게 ‘재생’한다는 말인가



▲ 배고픈 다리 부근.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시력 2.0이어도 알아볼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씨만 쓰여 있는 저 표지석. 근현대 한국사회의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5.18의 현장이 이렇게 표지석 하나로만 버텨내며 더욱이 온갖 것에 둘러싸여 마냥 이렇게 서 있다는 것은 기가 막힌 통증이었다.

죽음과 피와 눈물과 노래와 함성과 땀과 영혼의 깊은 고뇌와 비겁과 도망과 회한과 나눔과 연대와 해방의 공동체와 미래사회의 한 가능성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는 금남로에 서보자. 그 어디에 80년 5월, 그 역사의 기억과 재생이 담겨있다고 느껴지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한번 겨울바람 부는 유동을 지나 누문로에 몸을 싣고 도청 분수대로 걸어보자. “없다.” 80년 5월을 상징하는 그 어떤 조각도 사진도 형상도 “없다.”

왜 금남로에는 국적불명의 나신과 형이상학적인 조각상만 서 있는 걸까. 아마도 두려운가보다. 그날을 상징하고 재생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게 두려운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 무거워서일까. 맨 얼굴의 5월을 대면하기가 너무나 무거운 것일까. 그날 죽은 영혼들의 외침이 너무나 버거운 것일까.



▲ 광주교도소 앞.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제껏 5월 관련 사업에 들어갔던 예산이 얼마인데, ‘5월의 기억과 재생 그리고 미러가 생생히 되살아 날 역사의 현장들이 이렇게 까지 방치되고 왜곡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유대인 대학살은 미국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유럽에서 자행된 학살이었다. 그들은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던 곳에 기념관을 세워 많은 것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과 재생 능력이 부럽다. 불과 25년 전의 역사 현장도 재생시키지 못한, 그래서 기억에서 조차 가물거리게 만드는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추신: 이 사진과 기사가 게재되면 표지석 정비니, 관리니 하면서 양동 포장마차나 학동 옷 노점상의 생존권이 바로 타격을 입지나 않을까라는 고민이 있다. 기사의 본뜻과 전혀 다르게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상황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빈다.



▲ 5.18 구묘역.

[글·사진=이경률 : 인터넷 시민의소리 기획위원]

♪kowoonim=midivent / houseof ♬


 
  
  전두환,노태우 5,18진압 훈장 왜 박탈하지않나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3. 11:52
"전두환·노태우 5·18 진압 훈장 왜 박탈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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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이야기☞ | 2005/10/06 (목)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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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노태우 5·18 진압 훈장 왜 박탈 않나"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기자] 현재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임 대통령에 대해 유공자 및 서훈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또한번 제기됐다.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은 6일 국회 정무위원회의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서 "전·노 전 대통령은 12·12 쿠테타로 실형을 받았기 때문에 참전유공자로서 대우는 받을 수 없다"며 "그런데도 국방부에서 공적조서를 올린 5·18 진압 관련 무공훈장에 대한 치탈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강제진압한 것과 관련, 태극무공훈장 받은 것을 포함해 모두 10차례의 훈장을 받았다. 또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는 등 10차례의 훈포상을 받았다.

이밖에 훈장을 받은 신군부 인사 중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모두 67명. 이들은 지난 1980년 6월 국무회의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강제진압을 위한 '충정작전'에 참가, 사태진압에 공헌한 대가로 유공 포상을 받았다.



하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된 뒤 훈장이 치탈된 경우는 충정작전을 지휘한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최세창 전 3공수여단장이 고작이다. 고 의원에 따르면 국방부는 "치탈 대상은 되지만 상명하복의 군조직 특성상 이들에게 훈장을 빼앗는 것은 군 위계를 흔들 수 있다"고 훈장을 박탈하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고 의원은 "두 전직 대통령이 실형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훈·포장을 박탈하는 것도 가능하고, 최소한 5·18 강제진압과 관련된 것들만이라도 박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석옥/바다 ♬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우리가정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3. 11:50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우리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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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이야기☞ | 2005/08/28 (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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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우리 가정



증언자 : 김순만(남)

생년월일 : 1944.(당시 나이 36세)

직 업 : 대학 수위(현재 대학 수위)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김순만 씨는 5월 21일 아이들을 찾으러 밖으로 나왔다가 잡혔다. 그때 공수대에게 구타를 당하여 새끼손가락의 힘줄이 끊어지고 이도 하나 나갔다. 교도소와 상무대 교육대에서의 고통의 44일이 지난 뒤 그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는 6·25 때 형님, 형수님, 누님을 잃었다. 아버지도 6·25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거기에다 어머니마저 5·18 때 받은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6·25가 가져온 형제들의 죽음

나는 영암군 학산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우리 형제는 모두 5남매였다. 그중에서 둘째 형은 다섯 살 때 어린 나이로 죽었고, 큰형님과 큰누나는 6·25 때 희생되어 지금은 나와 내 바로 위의 누님 한 분만 남았다.

나는 7살 때 6·25를 맞았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타격이었겠지만 우리 집에서도 그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큰형님은 그 당시에 경찰 후속 자위대에 소속돼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빨치산한테는 눈엣가시와도 같았을 것이다. 빨치산은 검정면에 있는 뒷산에 있으면서 주로 밤에만 마을로 내려왔다. 낮에는 경찰들이 활동해 못 내려오고, 밤에 마 을에 내려온 빨치산들은 큰형님을 내놓으라고 닥달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도 큰형님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주로 낮에 경찰들과 함께 마을에 왔다가 어디론가 퇴각해 가곤 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우리 집 형편이 남부럽지 않을 만큼 여유가 있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지주급은 못 되었어도 상류층에 들 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라서 땅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집이 503평 정도로 굉장히 큰 집이었다.

아버지는 부락 사람들로부터 상당히 인심을 얻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에 소위 인민재판을 할 때 마을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는데, 그중에는 빨치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로 형님을 내놓으라고 아버지를 때리는 일도 맡아서 했다.

그때 아버지가 마을에서 얻고 있는 인심 덕분으로 아버지에게 가해지는 체형이 어느 정도 적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1950년 내가 7살 때 일이었다. 형님을 찾지 못한 그들이 먼저 형수님과 누님 두 생명을 빼앗아 간 것 이다. 그 1년 뒤인 1951년 형님도 그들의 손에 죽었다. 당시에 형님이 소속돼 있던 자위대가 빨치산 토벌작전을 나갔다가 형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형님의 나이 25세였다.

어머니는 43세 되던 해에 나를 낳으셨다. 지금 살아 계시면 88세이신데, 늦게 나를 낳으셨기 때문에 장형과 막내인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았던 것이다.

부모님께 전란이 가져온 충격은 컸다. 형님과 형수님, 누님, 세 분을 잃으셨다. 원거리에 있는 땅도 거의 없어졌다. 자식이라곤 누나와 나 둘뿐이었다. 자연히 독자가 되어버린 나에 대한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지나친 관심이 내 앞길 망쳐

나는 1956년도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구림중학교에 다녔다. 구림중학교보다 더 좋은 낭주중학교가 있었으나 집에서 멀다는 이유로 구림중학교에 간 것이다. 부모님은 누나가 일찍 결혼하고 나 혼자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집을 떠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셨다.

중학교를 마친 나는 고등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학산면내에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하시는 부모님 때문이었다. 광주, 목포에 살고 있는 아버지 친구분들이 나를 그쪽으 로 보내면 방을 제공하겠다고까지 했으나,

"너를 멀리 떠나보내고 우리가 어떻게 살겠느냐? 네가 외지로 나가 꼭 학교를 다녀야겠냐?"

하며 극구 반대를 하셨다.

남들은 없어서 못 배운다는데 넉넉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배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 나에게도 문제는 있지만 어쩌면 나는 부모님의 희생양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6·25만 없었더라도, 6·25가 형님을 빼앗아 가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은 쉽게 열렸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69세를 일기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6·25 때 당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너무 컸고 화병이 도졌던 것이다.


직장을 찾아 온 가족이 광주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실상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아직 어린 나이로 내가 농사를 잘 지을 리 만무했다.

나는 22세의 나이로 결혼을 했다. 그 뒤에는 일꾼을 내보내고 내가 직접 농사를 지었다. 나는 5남매를 낳았는데, 죽자사자 농사를 지어봐야 농사 밑천을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누나의 권유로 1979년도에 광주로 올라오게 되었다.

애들을 찾아 도청까지

1980년 아내는 광천동에 있는 농가게에 다니고 있었다. 그 농가게는 이름 있는 회사에서 하청을 받아 제품을 만들었다. 같은 회사의 상표를 달고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이라도 그 회사에서 직접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하청을 주어 물건을 만들게 한 뒤 그중에서 합격품, 불합격품을 골라 그 회사 상표를 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았다.

집사람은 그곳에서 농에다 페인트칠을 했다. 거기서 얻는 수입은 쥐꼬리만했다. 내 한 달 월급이 7만 6천 원 할 때였으니까 여자로서 그 농가게에서 집사람이 받는 급료는 뻔한 게 아니었겠는가?

5월 18일날 휴교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내가 근무하고 있던 성인경상전문대학교에도 계엄군이 들어왔다. 그들은 31사단 소속 군인들인 것 같았다. 그들이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다.

수위로서 학교 정문에 근무하면서 우리는 그들과 자주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까지 이렇게 들어올 수 있소?" 처음엔 이렇게 말도 해보았으나 그들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들어온 뒤 3일간 그들이 숙직을 전담했다.

그들은 주로 학생들이 등교하는 것을 통제했다. 또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외부 사람들도 학교에 들어올 수 없었다. 교직원을 비롯한 학교 직원들은 출입증을 제시한 뒤에야 출입이 허용되었다.


출입증이 없는 사람은 정문에서 인터폰을 통해 본부나 아는 교직원과 연락을 취한 다음에 들어올 수 있었다. 광주시내에 있던 전남대나 조선대, 서강실업전문대 등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출입증이 있었기 때문에 20일까지 별 변화없이 근무를 했다. 20일 저녁에는 학교에서 야근을 했다. 그날 밤에 시내 쪽에서 상당한 소요가 일어났던 모양이다. 우리 학교 옥상에 올라가서 보면 광주시내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나는 궁금해서 옥상에 올라가보았다.

군인들 몇 명도 그곳에 올라왔다. 옥상에서 보니까 광주교육대 부근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광주교육대 쪽이라는 것을 몰랐다. 옆에 있던 주둔군의 사령관이 그쪽에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기 집 근방에서 난리가 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물었다.

"아저씨 집은 어디요?"

"난 신안동이오."

그는 나더러 밖에를 한번 다녀오라고 했다.

"에끼 이 사람아, 밖에 나가기만 하면 찔러버린다 안 하더라고."

"아저씨 같은 사람들은 괜찮아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 같은 나이든 사람들이 20일까지는 밖에서 활동하는 데 별지장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아니면 그가 그때 상황을 잘 몰랐을 수도 있다. 아무튼 얘기는 거기서 끝났고, 내가 집에 갔다와야 할 의무도 없었으려니와 그럴 마음도 없었기에 관두었다.

21일 아침이 되어 퇴근을 하려는데, 그날 아침에는 이상하게도 교대조가 늦게 나왔다. 8시에 교대조가 출근을 하면 인수인계를 한 뒤에 퇴근을 했다. 그런데 평소보다 훨씬 늦게 출근한 교대조는 시내에서 차량이 통제되고 분위기가 살벌하여 길을 돌아서 오느라고 늦었다고 했다.

교대조에게 인수인계를 한 뒤 자전거를 타고 퇴근길에 올랐다.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광천동 사거리쯤에 오니까 차량이 통제되고 있었다. 송정리 쪽에서 오는 차량은 중앙병원까지만 운행이 가능했고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광천동 공단 네거리에서부터 우리 학교까지는 완전히 평화지대였다. 우리 학교 왼쪽에서 첫번 째에는 정보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국군통합병원이 위치하고 있었고, 학교 뒤쪽으로는 상무대가 있었다. 그쪽에서는 감히 어떠한 소요도 일어날 수도 없었다. 차량도 공단 사거리까지만 통제되었고, 학교는 마음대로 통행이 가능했다. 송정리 쪽에서 오는 모든 차량이 우리 학교 앞까지 밀려와 되돌아가곤 했다.

그때까지 일어났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 나는 별로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는 구경나가지 않았다. 나갔다가 괜히 얻어 맞으면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길에 차량이 통제되는 것을 보고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서서히 자전거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나에겐 확실한 신분증이 있었기 때문에 별로 두려움이 없었다. 광천동에서 아내를 만났다. 아침에 농가게에 출근을 했던 아내는 농가게가 문을 열지 않은 것을 보고는 그날 따라 유난히 늦어진 나의 퇴근길을 걱정하면서 나를 마중나오던 길이었다. 아내와 함께 집에 도착했는데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
애들이 모두 나가고 없다. 어서 나가보아라."

"뭐 하러 나갔대요?"

"구경한다고 나간 것 같다. 아이고, 길도 잘 모를 텐데 걱정이다."

광주로 이사온 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애들은 광주 지리를 잘 몰랐다. 더욱 걱정이 되었다. 나는 아침밥을 먹은 뒤 출근복을 그대로 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아내도 함께였다. 길거리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어디에서 애들을 찾는단 말인가? 막막했다. 2번 버스가 다니는 길을 따라 광주역 쪽으로 갔다.

"자네는 이쪽으로 가소. 나는 이쪽으로 갈 테니까."

아내와 나는 서로 길을 걸어갔다. 광주역을 지나고 유동 삼거리를 지났다. 가던 도중 시위차량을 만나기도 했다. 유리창이 모두 깨진 차에 탄 시민들은 차체를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도청 쪽으로 간다며 우리들을 보고 차에 타라고 했으나 아이들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나는 타지 않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도청 앞에까지 이르렀다. 도청 앞에는 경찰들과 군인들이 시커멓게 서 있었다. 시민들이 군인들과 몸으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자동차보험 빌딩 앞에서부터 도청 앞까지 금남로 거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시민들은 모두 겹겹이 둘러싸인 철의 장막(?)을 뚫고 도청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도청 앞으로 돌진하는 장갑차에 총격이

오후 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장갑차 한 대가 서서히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 뒤를 버스 한 대가 뒤따랐다. 버스에는 운전수 외에 몇 사람이 더 타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과 그곳에 있던 시민들 사이에 묵시적인 약속이 이루어졌다. 차가 돌진함과 동시에 모두 한꺼번에 몰려가자는 듯 했다. 장갑차와 버스는 길을 뚫어버리자고 군인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시민들도 함께 우하고 몰려갔다. 그러자 경찰들과 군인들은 우르르 도청 안으로 도망갔다.

마침내 철의 장벽이 무너지고 길이 뚫릴 즈음이었다. 난데없는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장갑차와 버스에다 대고 쏜 것 같았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 중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죽었을 성 싶다. 이번에 광주특위 청문회를 보니까 21일 오후 1시 30분 발포는 자위권 발동에 의한 위협사격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보았던 바에 의하면 그런 것 같지가 않다. 그들은 분명히 차에 대고 총을 쏘았던 것이다. 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때 시민들 중에도 총에 맞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장갑차와 버스는 총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달렸다. 아마 그랜드호텔 쪽이거나 그 옆골목이었을 것이다. 시민들도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났다. 총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최루탄도 날아왔기 때문이다. 도청 안으로 퇴각했던 군경들도 다시 몰려나오며 시민들의 뒤를 쫓았다.

나는 수산업협동조합 건물 뒷벽 쪽에 있었다. 최루가스를 난생 처음으로 맡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무조건 어느 곳으로 뛰어들어갔다. 식당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식당 안에는 20여 명의 시민들이 몰려있었다. 한참 지난 뒤 밖이 좀 차분해지자 시민들은 한둘씩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점심을 안 먹었던 나는 그때서야 시장기를 느꼈다.

"여기 밥 팔아요?"

식당 주인에게 내가 묻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에이 여보쇼, 이런 판국에 지금 밥을 팔게 생겼소. 댁에 가서 드시오."

그는 말하기를, 종업원이 한 사람도 안 나와서 밥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귀가길에 공수대에게 붙잡히다

배도 고팠고 아이들도 혹시 집에 들어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귀가길에 올랐다. 충장로 1가 쪽으로 내려오는데 간호원들이 뛰어나와서 부상자들을 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 도청 진격 후 도망을 치다가 군인들에게 당한 것 같았다. 총에 맞았는지 곤봉에 맞았는지 그것은 구별할 수 없었다. 몇 사람이 축 늘어진 채 실려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다시 금남로로 나와서 서서히 내려오는데 시민들이 밥, 빵, 음료수 등을 가져 와 사람들에게 주고 있었다. 배가 몹시 고팠기 때문에 나는 걸으면서 문을 연 식당이 있는가 살폈다. 먹으려고만 하면 먹을 수도 있었지만 앞에 음식이 있는데도 길거리에서 먹는다는 게 이상해서 그만두었다. 그때 거리에 앉아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대부분 넝마주이였을 것이다.

5·18이 나기 이전까지만 해도 넝마주이들이 많았었다. 그들은 몇 명씩 무리를 지어 다녔다. 행실이 거칠고 험악했다. 돌아다니면서 동냥을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물건을 훔쳐가기도 하였다. 내가 근무하고 있던 성인경상전문대학에도 그들은 자주 왔다. 그렇게 많았던 넝마주이들을 5·18이 지난 뒤에는 아예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아마 5·18 때 많이 죽지 않았을까 한다. 그들이 죽었다고 해도 대부분 홀홀단신으로 가족도 없이 떠돌던 사람들인지라 사망자나 행불자로 신고되지 않았을 것이다.

헬기가 한 대 떠서 자제를 요청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금남로에는 다시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동차보험에서부터 도청 사이에만 있었고 그 뒤부터는 밤과 같이 고요한 거리였다. 모든 상점의 문을 닫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도청 쪽으로 몰려가고 없었다. 내가 '자동차보험' 건물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광주역으로 가자고 외쳤다. 사람들이 광주역으로 향해 오고 있다고 했다. 나도 거기에 따라붙었다. 어차피 집으로 가는 길도 그쪽이었고, 또 혼자 걷느니보다는 여럿이 걷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광주역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울, 광주간 기차가 끊긴 상태였는데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올 리 만무했다. 다만 스피커에서 여자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시민들에게 어떻게 하자고 당부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시외곽지역으로 나가는 길에 계엄군이 매복해 있으므로 위험하니까 될 수 있으면 시내에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거기서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전날 저녁에 야간근무를 했기 때문에 잠을 못 잤고 많이 걸었던 탓으로 몹시 피로했다. 걸음을 재촉해서 내가 전남대 사거리 조금 못 가서 철교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람들이 그쪽에 몰려 있었다. 철교 위와 아래에는 공수대들이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사람들이 지프차에 불을 붙여 공수대 쪽으로 몰고 갔다. 웬만큼 거리가 가까워지자 운전수는 뛰어 내리고 차는 공수대 쪽으로 밀어버렸다. 그런데 차가 곧 멈췄으므로 거기서 다친 사람은 없었다. 시민들의 그런 행동을 공수대는 관망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총을 멘 채 그냥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10분간 구경을 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때 시민들의 행동이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았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전남대학교로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군인들이 철수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다시 집을 향했다. 나이든 사람 너덧명이 집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고는 얼른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앞서 가는 그들과 나와의 거리는 10미터 정도였다. 함께 가고 있었지만 피곤해서 도저히 걸음을 빨리 할 수 없었다. 내 뒤에서도 몇 사람이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은 복개되고 없지만 신안동 동사무소 쪽으로 가는 조그만 천변길이었다.

공수대는 광주역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었다. 철둑 위에도 죽 일정한 간격으로 군데군데 서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도 나는 별로 위험을 못 느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하랴 싶었다.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안심이 되었다.

동사무소 가까이 왔을 무렵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총을 난사하면서 우리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악도 썼다. 앞으로 계속 달려버렸으면 괜찮았을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놀란 나는 우선 가까이 있는 동사무소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피할 수 없는 곳이었었다. 어느 쪽에서 왔는지 사람들이 일곱 명 정도가 있었는데,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들이면 모를까, 그렇게 젊은 사람들 틈에 있으면 틀림없이 당하더라도 더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공수대가 들어왔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10-20명 사이였을 것이다. 오자마자 그들은 우리들을 무차별 난타했다. 곤봉을 사정없이 휘두르고 워커 발로 밟았다. 될 수 있는 대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는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때 곤봉에 맞아 새끼손가락을 잇는 힘줄이 끊어져버렸다. 이도 하나 나가 버렸다.

한참 구타를 당한 후에 우리들은 끌려갔다. 동사무소에서 잡힌 사람은 모두 10명 정도였다. 그들은 우리들의 웃옷을 잡아뜯어 벗겼다. 또 허리띠를 모두 풀게 한 뒤 그것으로 손을 묶었다. 그런 다음 철둑길로 끌고 가서는 '원산폭격'을 시켰다. 그것이 끝나자 우리 모두는 용봉국민학교 앞길로 해서 전남대학교로 끌려갔다. 나는 끌려가면서 공수대 소령한테 항의했다.

"도대체 뭣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데려가는 것입니까?"

"야! 이 새끼야, 까불지 마. 너 돌멩이 몇 개 던졌어?"

말 한마디도 못한 채 무차별 구타를 당한 것도, 또 험악한 모습으로 끌려가는 것도 참으로 억울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아무 일도 안 했으니까 신분증을 보여주면 곧 보내주겠지.'

차 안에다 최루가스를 뿌려

전남대 본관 앞에 있는 용봉탑을 지난 뒤 어느 강의실로 끌고갔다. 별로 큰 강의실은 아니었다. 강의실 안은 먼저 잡혀온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그들은 모두 웃옷을 벗은 상태로 자신들의 혁띠로 손을 뒤로 묶인 채였다. 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우리들도 들어가자마자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야 했다. 그렇게 있으면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언뜻 보기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등은 물감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이번에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윤흥정 씨가 증언한 내용 대로 하자면 시위 한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 뿌린 물감이었다. 윤흥정 씨는 화염방사기를 통해서 물감을 뿌렸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지 모르겠다. 머리에 피가 엉겨붙은 사람도 있었다. 머리를 곤봉으로 구타당한 뒤 흘렸던 피가 그대로 응고되어 버린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조사를 받았다. 머리를 처박은 채로 있다가 한 사람씩 앞으로 불려나갔다.

"야! 이 새끼, 너 이리 나와."

발로 툭 차며 그들은 한 사람씩 불러냈다. 나도 그렇게 해서 불려나갔다. 나가자마자 주민등록증을 비롯하여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너 어떻게 해서 시위를 하게 됐냐?"

나는 시위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때까지 일어났던 일을 대강 말했다. 야간근무를 한 뒤 아침에 퇴근해 보니까 아이들이 없어서 찾으러 나왔다고 했다.

"이 새끼야, 거짓말 마. 그럼 너 차 탔어. 안 탔어?"

"애들을 찾으러 나간 사람이 차를 타겠습니까?"

"이 새끼, 신원조사 해보면 당장 나타나. 거짓말 하지마. 너도 같이 했잖아."

나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바로 앞에 나갔던 사람이 항의를 하다가 많이 맞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고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비명소리를 들었다. 조사가 끝난 뒤 밖으로 끌려나왔다.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뛰다시피 어떤 차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차 안은 컴컴했다.

단지 고개를 내놓을 만한 윗구 멍에서 광선이 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차의 입구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올라가기가 힘이 들었는데 늦게 올라간다고 발길질을 해댔기 때문에 뛰다시피 들어갔 던 것이다.

그곳에 10여 명씩 들어갔는데 차 내부가 꽉찼다. 우리들을 차 안으로 밀어넣은 뒤 그들은 무슨 가스를 뿌렸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눈물이 나고 목이 아팠다. 최루탄 가스, 아니면 다발탄 가스였을 것이다. 조그만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가스로 인해 기진맥진했다. 정신이 아득했다. 공기가 통하는 곳이라곤 차 위 쪽에 나 있는 조그만 구멍뿐이었다. 점심도 못 먹었던 나는 별로 힘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견딜만 했다.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잡혀온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 아무튼 물 한 방울도 못 마시고 며칠간을 지냈기 때문에 기력을 잃어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우리들의 정신을 잃게 해서 그들이 가한 잔학행위를 잊게 하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연행장소나 연행된 거리를 숨기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혹은 공포감을 심어주어 우리들을 더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몇 분간 지독한 가스에 시달린 우리들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군용 트럭에 실렸다. 몇 명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군용 트럭이 꽉찼다. 우리들을 태운 뒤 그들은 군용 트럭을 포장했다. 밖에서 봤을 때 빈 차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들도 밖을 전혀 내다볼 수 없었다.

단지 벌어진 틈이라고는 차 앞 쪽에서 우리들을 향하고 있는 총구가 들어온 구멍뿐이었다. 운전석에 탄 군인들은 운전석 뒤에 달린 창문을 통해 총구를 들이대고 감시했다. 차가 지나가는 양 옆 도로변에서는 군인들이 차를 따라 행군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춰야 했기 때문에 차는 천천히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은 모두 여전히 손을 뒤로 묶인 채였다. 또한 군인들의 삼엄한 감시 때문에 감히 도망갈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묶인 손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다시 묶일 것 같아 풀어진 곳을 손으로 잡고 있었다. 하지만 군용 트럭에 태워진 뒤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손을 앞으로 내릴 수가 있었다. 나는 차의 앞쪽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총구가 들어온 곳으로 밖을 볼 수가 있었다. 차는 전남대 후문을 지나서 어디론가 갔다. 한참 지난 뒤엔 시외곽으로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몇 시쯤이나 되었을까? 해질 무렵 차는 멈췄다. 군인들은 차에 씌워진 포장을 벗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우리들에게 달려들었다.

"이 개새끼들!"

그들의 손에는 대검이 꽂힌 총이 들려 있었다. 닥치는 대로 그들은 대검을 휘둘렀다. 차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대검에 찔리지 않기 위해 가운데로 몰려들었다가 앞쪽으로 쏠렸다가 난리였다. 나는 앞쪽에 있었기 때문에 대검을 피할 수 있었다. 두 팔과 정신이 멀쩡했기 때문에 내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기진맥진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대검을 피할 수 없었다. 또 대검에 찔리지 않기 위해 이쪽저쪽으로 몰리는 사람들의 발길을 피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짓눌린 채로 그들은 실신했다. 나중에 들어보니까 거기서 몇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광주교도소의 창고에 4, 5백 명 수감되다

그렇게 한바탕 당한 뒤에 우리들은 다시 차에서 내려 어느 건물 앞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는 손을 더 이상 묶지 않고 풀어줬다. 무릎만 꿇게 했을 뿐이다. 분위기가 훨씬 자유스러웠다. 말도 할 수 있었고 담배를 피울 수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의 소지품을 모두 압수했다.

"가진 것 있으면 지금 모두 내놔. 만약에 조사해서 물건이 발견되면 죽을 줄 알아."

담배와 라이터까지 압수를 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은 실컷 피우라고 했다. 몸에 지니지는 말고 피우려면 피우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 깊숙이 담배를 숨겨 가는 사람도 있었다. 소, 대변을 볼 사람은 보라고 했다. 공포증에 시달려 내장이 타버렸는지 대소변을 보러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곧이어 우리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함께 들어간 사람은 대략 4백-5백명이었다. 들어갈 때 혁띠를 모두 압수당했다. 우리들이 들어간 곳은 굉장히 넓은 곳이었다. 우리들을 그곳에 수용하기 위해 매우 급하게 준비한 것 같았다. 처음엔 맨 땅이었으나 나중에는 가마니를 깔았다. 덮을 것도 없었으나 심문이 끝난 뒤로 모포 몇 장이 나왔다.

처음에는 그곳이 어딘지 잘 몰랐으나 알고 보니 광주교도소 안에 있는 창고였다. 들어가서 10일간은 조사를 받았다. 그런 뒤에야 창고 밖으로 나와서 한 번씩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죄를 짓고 들어온 일반 수감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가 있는 곳이 교도소 창고라는 걸 알려주었다. 창고 앞에는 일반죄수들이 세탁을 하는 우물이 있었는데, 건물 앞에 우물이 있다고 하자 그곳이 바로 창고라고 했다.

들어가던 21일 저녁에는 자리가 비좁았기 때문에 눕지도 못하고 그냥 아무렇게나 잠을 잤다. 먹을 것을 전혀 주지 않다가 22일 저녁이 되어서야 건빵 한 봉지씩을 주었다. 물도 없이 건빵만 주었기 때문에 배는 고팠지만 그 건빵을 다 먹지 못하였다. 입 안에 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간 굶어 탈진한 상태였기에 입 안에 침이 있을 리 없었다. 건빵 안에는 별과자가 열 개 정도 들어 있었다. 별과자가 입 안에서 녹으면서 침이 생겼다. 그것으로 간신히 건빵을 넘겼다. 별과자 10개로 건빵 20개 정도를 먹었다. 먹지 못하고 남은 건빵을 베고 자기도 했다.

첫날 저녁에 한 명이 죽었다. 물을 달라고 외치면 군인들이 와서 사정없이 밟아 버렸다. 군인들이 문을 닫고 나가버린 뒤에 사람들은 그에게 오줌을 싸서 주었다. 그 전에도 나는 사람이 오줌을 먹는 경우가 있다고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때 처음 보았다. 컵으로 오줌을 받아서 준 모양인데 처음에는 버리고 나중 것은 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갈증이 해소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까 그 사람은 죽어서 가마니에 덮여 있었다. 군인들이 시체를 내갔다.

23일 아침부터 밥이 나왔다. 밥이래야 보리에 콩과 쌀이 몇 알씩 섞여진 순꽁 보리밥이었다. 또 사각 모양으로 잘라져 나왔는데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을 수저로 찌르면 밥이 대롱대롱 달려나올 정도였다. 반찬도 국물도 없이 물만 주었다. 이를 다친 나는 그 딱딱한 밥을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밥을 못 먹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군인이 물었다.

"여기서 죽 먹을 놈들 몇 놈이나 되냐?"

그 뒤로는 죽을 먹게 되었다. 5일간 죽을 먹었는데 더 계속 먹을 수 없었다. 죽을 먹은 뒤 2시간 정도 되면 곧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소화가 빨리 되기도 했고, 크지 않은 스덴 그릇으로 하나씩만 주었기 때문이다.


극렬시위 가담자라는 거짓 자술서 강요당해

조사를 받을 때는 한 사람씩 불려갔다. 교도소 건물 2층에서 받았는데, 그곳에는 책상 서너 개가 놓여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사복 수사관이 그때까지의 상황을 얘기하라고 했다. 아이들을 찾으러 나왔다가 거기까지 끌려오게 된 과정을 죽 얘기했다. 수사관은 내 얘기를 듣고 자술서를 작성했다. 그러더니 자기가 읽을 테니까 틀린 것이 있으면 말하라며 자술서를 읽었다. 자술서의 내용은 내가 했던 얘기와는 전혀 달랐다. 나를 완전히 극렬 시위가담자로 써놓고 있었다.

"내가 애기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야, 이 새끼야, 그러면 네가 데모를 했지 안 했어?"

"애들 찾으러 나왔다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 했지, 내가 언제 데모했다고 했소? 다시 하시오."

"이 새끼 봐라. 너 데모 안 했으면 왜 잡혀왔어? 또 데모 안했는데 왜 맞았어? 네 상처만 봐도 분명히 데모했잖아?"

그는 군인들이 선량한 시민을 때리겠냐고 도리어 나에게 물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인정을 하지 않자 그는 병장을 불렀다. 한번 맛 좀 보여주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병장한테 끌려가 소위 '빳다'를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맞고 난 뒤에 다시 조사를 받았다.

"너 이 새끼 이래도 안 했다고 해?"

했다고 해야 할지, 안했다고 해야 할지 나는 망설였다. 시인하자니 내용이 너무 엄청나고, 부인하자니 또 맞을 것 같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대답을 안 하니까 데모를 했다고 시인한 걸로 인정되어 조사가 끝났다. 그런 뒤 군인에게 업혀서 창고로 갔다. 많이 맞은 탓으로 내가 보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층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를 업은 군인은 말했다.

"아저씨, 무조건 했다고 하세요. 안 했다고 하다간 괜히 생죽음만 당해요. 우리가 아저씨를 때리고 싶어서 때리겠어요. 자술서를 작성하는 데 자백을 받으려고 그러는 것이니까 우리 원망은 마세요."

나를 조사했던 수사관은 허장완이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번에 양심선언을 한 것으로 안다. 그는 광주 사람이었다. 나는 석방된 뒤로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가 작성했던 나에 대한 자술서의 내용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나오고 나서도 불안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점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빌미로 석방된 뒤에 사람들이 그들에게 당했던 모든 것에 대해 함구하도록 했던 것이다.

한 번 조사를 받고 난 뒤에 나는 더 이상 불려가지 않았다. 두세 번이나 불려갔다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반죽음 상태로 돌아오곤 했다. 미처 치우지 못 하고 한쪽에 쌓여 있던 물건들을 가지고가자 창고 안이 넓어졌다.

그곳에 있는 몇백 명의 사람들은 모두 간신히 누울 수 있었다. 한쪽에 '변기통' 3개를 놓았다. 대소변용이었는데, 그것은 드럼통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창고 안은 악취가 심했다. 휴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옷을 찢어 사용했지만 그런 것쯤은 당시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자리를 넓게 잡고 좀 더 편하게 있을 것인가? 잠을 좀더 잘 것인가?' 하는 것들이 더 중요했다. 악취가 심했지만 그것 역시 문제도 안 되었다. 사람들은 똥, 오줌냄새를 맡아야만이 극한상황에서도 살아날 수 있다고 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제일 고통스러웠던 때는 밤이었다.

도청이 진압된 27일까지 군인들은 계속해서 밤이면 광주시내에 나갔다 오곤 했다. 그들은 타박상 등 가벼운 상처를 입고 오는 수가 있었는데, 그 화풀이로 우리들을 무조건 때렸다.

"이 새끼들, 광주 새끼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다쳤어."

그들은 또 '취침!'이라고 해놓은 뒤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무조건 와서 때렸다. 나도 그렇게 한 번 당한 적이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데 탁! 하며 뭣인가가 머리에 부딪혀왔다. 동시에 칼날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 이 새끼 일어나."

그러나 나는 일어나지 않고 계속 잠을 자는 척했다. 일어나면 분명히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새끼 잠꼬대 했나?"

하면서 그만두었다.

어느 날 저녁에는 교도소 부근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있으니까 군인들이 씩씩거리며 들어와서 말했다. 어떤 놈들이 교도소를 습격하기 위해 왔는데 다 죽여버렸다고 했지만, 그들이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을 과장해서 하곤 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매우 궁금했다. 뒤에 들은 바에 의하면 시민군들이 일부는 담양 쪽으로 가고, 또 일부는 교도소 쪽으로 왔다고 한다.

상황 염탐군으로 몰린 이리 사람

그곳에 있으면서 나는 매우 어이없이 잡혀온 사람들을 보았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어이없게 잡혀왔지만 말이다. 21일날 '광성여객' 회사 직원들 8명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들은 회사에서 차량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키고 있다가 잡히거나, 일직이어서 사무실에 나왔다가 잡혔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차량절도죄로 몰렸다. 차량탈취를 해 시위를 했다고 몰아붙였으나 8명이 계속 진정을 함에 따라 회사로 연락을 취하여 신원을 확인하였다. 다행히 그들은 우리들보다 더 먼저 나갔다.

23일에는 이리에 사는 사람이 잡혀왔다. 그는 조그만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광주시와 통화가 불가능했으므로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금 조달면에서나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직접 광주에 와보기로 하고 자가용을 몰고 왔다고 한다. 비아까지는 아무 일 없이 내려왔다. 그는 '말로 듣기와는 다르구나. 이렇게 차가 마음대로 다니는 걸 보면 광주까지는 괜찮을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를 본 그곳 사람들은 광주로 가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생각 대로 광주를 향해 차를 몰았다고 한다. 비아를 지나 얼마만큼 오는데 갑자기 도로 양옆 산에서 총알이 날라오기 시작했고, 그 총에 맞아 차 바퀴가 터져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는 더 속력을 내어 차를 몰았다고 한다.

한참 달린 뒤에 차가 길 옆 고랑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그는 결국 잡힌 것이다. 그는 머리가 깨진 채로 들어왔는데 대검에 찔렸다고 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검에 찔린 뒤 정신을 잃고 끌려왔다는 것이다. 그는 잡혀와서 굉장히 시달려야 했다. 광주상황을 염탐하기 위해 내려왔다고 난리였던 모양이다.

도청에 다시 계엄군이 진주하던 27일 새벽 군인들은 말했다.

"너희들 행복한 놈들인 줄 알아."

우리들 중 누가 이유를 묻자,

"오늘 광주시가 쑥밭이 되는데 너희들 가족은 죽더라도 너희들은 우리가 보호해 주고 있으니까."

말인즉 그들이 말하는 소위 도청 진압작전이 실시되는데, 만약 어려움이 있다면 광주시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었다.

28일부터는 교도관들이 들어왔다. 교도관들도 그때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21일 근무를 맡은 사람이 교대를 못 하고 27일까지 죽 근무했다. 교도소에 많은 사람들이 잡혀와 있다는 걸 알리지 않기 위해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일반죄수들도 27일까지 일주일 동안 감방 안에 꼬박 갇혀 있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밖에 나와서 작업도 하고 운동도 했는데 가둬만 둔 것이다. 27일 이후에 그들은 종전대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우리들도 창고 밖으로 나와 움직일 수 있었다.

밖에서 그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과 우리를 사이에는 새끼줄이 쳐져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를 가르고 있는 38선처럼. 밖으로 나왔을 때 여자들도 우리들처럼 잡혀와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직접 보지는 못 하였다.

또 27일 이후부터 칫솔, 치약, 비누, 타올 등이 나왔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광주에 있는 어떤 방위산업체 사람들이 돈을 거두워 사보낸 것이라고 했다. 그 뒤 얼마 지나서 군용 팬티와 러닝샤쓰가 나왔다.

그것들을 우리들에게 주면서 입고 난 뒤 반납하라고 했다. 한 번만 입으면 그냥 더러워지는 것을 말이다. 우리들은 군용품이라며 별로 입지도 않았다. 휴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찢어서 휴지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교도관들이 머큐로크롬을 가져와 상처를 치료 해 주기도 했다.

어느 날 교도관이 내 이름을 호명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또 뭐가 잘못되어 끌려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슴을 조였다. 옆에 있던 서석고등학교 3학년 학생(그 학생이 지금은 내가 근무하고 있는 호남대학교에 다니고 있다)이 나에게 말했다.

"아저씨 이름 아니요?"

내가 대답을 않자 교도관은 괜찮으니까 있으면 대답하라고 말했다.

"접니다."

그러고는 나오라고 해서 나갔다.

교도관은 나에게 박종근 씨를 아냐고 물었다. 매형의 이름이었다. 내가 매형 된다고 얘기를 하자,

"매형을 좀 아는데 당신이 여기 있는가 확인해 달라고 했다"

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또 연락사항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나는,

"뭐 연락할 게 있겠소? 어머님이 한 분 계시는데 연락을 해보아야 괜히 걱정만 끼쳐드릴 텐데. 나가서 그저 잘 있다고만 말해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그는 또 애로점은 없냐고 물었다. 다음날 근무교대로 밖에 나가게 된다며 부탁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나는 집으로 연락해서 담배 좀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제일 궁한 게 담배였다. 교도관에게 말한 그 다음날 담배가 들어왔다.

처음에 담 배 한 보루가 들어왔는데 한자리에서 없어지다시피 했다. 창고 안으로 그냥 던져줬으므로 내 손에 들어온 건 한 갑뿐이었다. 그것을 주위 사람들과 나눠 피고 나니까 호주머니에는 대여섯 개피만이 남았다.

나는 하루에 두 갑 이상씩만 넣어달라고 말했다. 그것이면 주위 사람들과 나눠피울 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집에서 현금으로 얼마를 교도관에게 줬다고 했다. 담배도 넣어주고 애로점이 있으면 보살펴달라면서. 그러나 다시 현역군인들이 우리들을 담당하면서부터는 담배가 끊어졌다.

5·18 후에도 군인들은 아직 교도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일반죄수들을 맡을 손이 딸리게 되자 교도관들은 다 그쪽으로 가버리고 다시 현역군인들이 우리를 맡았다.

그런데 군인들 중에 광주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원동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저녁이면 담배 두 갑을 가져왔다. 그것을 두세 사람 앞에 한 개피씩 나눠줬다. 그곳엔 나같이 나이든 사람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 젊고 나이의 사람들이었는데 고등학생들도 많았다.

그 사람은 고등학생들에겐 담배를 주지 않았다. 나이 든 사람도 다 못 피우는 담배를 어린 놈들이 피울 수 있냐는 것이었다. 고등학생들은 우리가 태우고 남으면 그걸 피웠다. 그 군인의 이름은 누군지 모르지만 참 고마웠다. 아마 같은 광주 사람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부마사태처럼 총검 휘둘렀지만 더 악화된 상황

이번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윤흥정 씨가 얘기했던 걸로 안다. 그 교도소는 지역적인 감정을 고려하여 경상도인이 주측이 된 20사단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의 말 대로 우리를 담당했던 군인들은 거의가 경상도 말투였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5·18이 얼마만큼 과잉진압에 근거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역시 청문회에서 윤흥정 씨가 증언했던 것처럼 그들은 전라도 놈들은 완전히 오기만 남아 있다고 욕을 해댔다.

'부마사태' 때도 자기들이 진압을 했는데 총에다 대검을 꽂은 뒤 하룻밤을 휘둘러버리자 조용해졌다고 했다. 전라도 놈들도 그럴 줄 알았는데 강하게 진압하면 할수록 시위가 더 확산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A, B, C, D급으로 분류되었다. 나는 C급으로 분류되었다. D급이 아니고 C급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허장완이가 들어와 분류한 것에 이의가 있는 사람은 말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손을 들고 얘기했다.

"데모도 안 하고 그랬는데 왜 D급으로 안 하고 C급으로 했소?"

"야, 이 새끼, 너 학교에 근무할 때에도 허진이라는 학생을 조종해서 데모하려고 했던 놈 아니냐?"

나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성인경상전문대에 근무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있었던 일이다. 전날 야간근무를 한 뒤 아침에 학교 정리를 하는데 곳곳에 무슨 벽보가 붙어 있었다. 고교동문회 모임 공고 등을 그렇게 곧잘 붙이곤 했으므로 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날 아침 도서관에 갔다가 몇 명의 학생들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일찍 공부하러 왔구나 생각하고는 별로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 뒤에 나는 그냥 퇴근을 했는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날 아침 도서관에서 만났던 그 학생들이 교내에 의식있는 내용의 벽보를 붙여놨던 것이다(그 학생들 중에 허진이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당직근무자였던 내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그냥 퇴근을 해버렸으니 책임이 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요즘처럼 학생들의 시위가 일반화되지 않을 때였고, 특히 우리 학교는 그때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던 때라서 문제가 컸던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나는 서부경찰서에 불려가 1주일간 곤욕을 치렀다.

자술서를 작성하고 나왔는데, 그것이 컴퓨터에 입력이 되었는지 신원조회를 해보면 나왔다. 허장완이는 바로 그걸 두고 말한 것이었다. 또 허장완은 말했다.

"21일 도청에 나간 것은 학생들을 선동해서 데모를 하려고 했던 것 아니냐?"

"너는 주모자다. A급으로 할 수도 있는데 C급 정도로 관용을 베푼 것이다."

재수없이 된통 걸렸구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보내주겠지'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1980년 6월 15일 우리들은 광주교도소에서 상무대 교육대로 옮겨졌다. 그곳에 있는 교회에서 성경책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게 했다. 나처럼 30살 이상인 사람은 몇 사람 안 되었는데, 아저씨처럼 대우한다면서 어린 사람들 교육 좀 시키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하루 빨리 재판을 받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재판은 자주 연기되었다. 재판은 일주일에 하루만 했다. 그래서 그날 못 하면 또 일주일이 연기되었다. 5·18 이후에 시내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던 것이다. 상무대로 간 지 2주가 훨씬 지난 7월 2일 재판을 받았다. 재판을 받을 때 번호순으로 모여서 받았다.

나는 '수위'라고 하지 않고 회사원이라고 해가지고 회사원들과 함께 받았다. 우리들에게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은 채 판결이 내려졌다. 광주소요사태와 관련, 군법 몇 호 몇 항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므로 이러이러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그때 A급은 재판을 받은 뒤 징역을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B, C급은 같이 재판을 받은 뒤 함께 석방되었다. D급은 우리들보다 먼저 훈방되었다.


내가 죽었다는 점장이의 말 따라 시체 찾아나서

1980년 7월 4일,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나올 때 사람들은 버스 10대에 함께 타고 나왔다. 얼마나 무고한 시민들이 많이 잡혀갔는지 알 수 있다.

내가 나가서 며칠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자 아내는 답답한 김에 점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점장이가 하는 말이 내가 죽어서 전남대학교 뒷산에 묻혀 있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전남대 뒤로 가서 혹시 시체를 묻었던 흔적이 없는가 하고 수소문을 해보았다. 또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광주기독병원 등을 돌아다니며 시체확인을 했고, 도청 앞에서도 시체들을 뒤졌다. 그런 뒤 완전히 포기를 했다고 한다. 당시에 시체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어버렸다는 얘기들이 난무했 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증명서를 갖고 있으니까 죽었더라도 그걸 보고 연락을 해주겠지 하며 기다렸다고 한다.

교도소에 들어간 지 2주가 지나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우리들은 편지 내용도 몰랐다. 봉해진 편지에다 자기 이름과 주소만 기입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그 편지를 받고서야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교도소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맺힌 한으로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내가 집으로 돌아온 뒤 얼마 안 되어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6·25 때 형님, 형수님, 누님을 잃으셨던 어머니! 또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도 6·25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나마저 5·18로 그렇게 당하고 보니까 어머니는 당신이 무슨 죄를 졌길래 하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건강이 악화되셨는데, 내가 잡혀가있을 때는 그럴 경황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가셨다. 내가 나온 뒤에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풀려난 뒤 머리가 희어져 죽은 사람

5·18 때 나처럼 잡혀간 뒤 돌아와서 죽은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사람은 운천동에서 조그만 술집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학교에 자주 왔다. 학생들에게 준 외상 술값을 받기 위해서였다. 나는 처음에 그 사실을 몰랐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저렇게 학교를 들락거리는가 싶었다. 알고 보니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신성한 학교에 와서 지금 뭣 하는 것이냐? 당신 같은 사람이."

"내가 운천동 깡패여."

"깡패면 뭣 한다냐? 등치나 커가지고 깡패나 해야지. 너같이 작은 놈이 깡패 말 듣것다."

"이 새끼 깡패를 몰라봐?"

그는 나보다 몸집이 더 작았다. 그렇게 지냈던 그와 내가 상무대 교육대에서 만났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에게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교도소에 있다가 그리로 왔다고 하니까 그는 운천동 쪽에서 그냥 잡혀왔다고 했다.

"너 데모 좀 했냐?"

"너는 어쨌냐?"

"나는 데모했어야."

"뭐 너 같은 자식이 데모해야? 솔직이 말해."

"광주시민이 다 하는데 내가 안 했것냐?"

그는 많이 맞고 나온 뒤에도 돈이 없어서 처방을 못 했다. 그의 술집이 우리 학교 앞에 있었으므로 가끔씩 그를 볼 수 있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머리카락은 온통 희어져버렸다. 그러더니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까 죽었다고 했다. 생각할수록 그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식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어린애가 달린 과부를 데리고 살았는데 그가 죽은 뒤로 그 처자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는 아마 신고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부상자에도, 행불자에도, 사망자에도, 그 어디에도......

또 교도소에서 알게 되어 얘기를 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트럭을 가지고 장사를 하기도 하고 물건 배달을 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시내에서 운전을 하고 가던 중에 잡혀왔다. 그는 별로 외상은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 골병이 들었다. 나온 뒤에는 정신이상 증세까지 있다. 살림은 다 망해 버리고 지금은 달방살이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감추고만 싶었던 새끼손가락

나온 뒤에 경위서를 제출하고 그대로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해 5월, 6월달치 봉급도 나와 있었는데 나온 뒤에야 수령했다.

공수부대에게 맞았던 새끼손가락은 온전치가 못했다. 힘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제대로 펴지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병원에 가서 어떻게 할 수 없을까 하고 물어보았으나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부위를 찢은 뒤 뼈 안에 든 살을 긁어내고 잘 맞춘 뒤 깁스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수술을 한다고 하더라도 불룩한 부위가 가라앉기만 하고 손가락은 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대로 둔 상태에서 자주 운동을 하여 새끼손가락을 펴보라고 의사가 일러줬다. 나는 수위실에서 근무 를 할 때나 어디에서 앉아 있기만 하면 손가락 운동을 했다. 2년이 지나니까 마침내 손가락이 펴졌다. 지금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지금도 다쳤던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손가락이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을 때의 습관이었다. 남이 언뜻 보기에는 별로 몰랐다. 그러나 그 손가락에 매우 신경이 쓰였다. 내 신체부위 중 비정상인 곳이라고 스스로 취급을 해버렸던 것이다. 보기가 싫으니까 자꾸 감추려 했던 것이다.

1988년 11월 29일 건강관리협회에서 등급을 판정받기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때 다쳤던 손가락 부위를 촬영해 놓은 게 없냐고 의사는 물었다. 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의사가 했던 말을 죽 해줬다. 수술을 해서 손가락을 펴기가 불가능하므로 운동을 해보라는 등의 얘기였다. 의사는 내가 전에 병원에 왔던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물적 증거로서 촬영한 사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때의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이 그런 것을 생각했겠냐?" 하고는 "내가 거짓말을 하겠냐?"고 말했다.


소뼈 고아 먹으며 치료해

손가락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다리는 많이 맞았던 탓으로 속으로 골병이 들어 있다. 걷기는 괜찮지만 비가 오려고 하면 쑤시고 결린다. 지금도 밤이면 갑작스런 충격이 와 헛발길질을 할 때가 있다. 마치 말이 뒷발질을 하는 것처럼. 그러면 옆에 있던 사람이 매우 놀라게 된다. 또 다리가 결려서 잠을 못 자고 날을 새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갈수록 더해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주로 한방치료를 해왔다. 친구가 한약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더 싸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먹었던 보약은 한 제에 보통 4, 5만원 씩 했다. 비싸서 먹을 수는 없었지만 녹용이 들어 있는 것은 20, 30만 원씩 하기도 했다. 돈도 돈이려니와 한약은 달이기도 힘들 뿐 아니라 꼭 제때에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친구의 말을 듣고 소뼈를 고아먹기 시작했다. 소뼈는 돈도 더 적게 들었고, 한번 달여놓으면 시간나는 대로 먹을 수 있었다. 또 여름에는 냉장고에 보관해 놓고 먹을 수 있었다. 몸에는 한약 이상으로 좋은 것 같았다. 거기다가 1988년 6월부터는 병원에 다니며 거기서 약을 타다가 먹고 있다. 약값만 해도 한 달에 5만 원 이상씩 들어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지금은 7백40만 원에 입주한 화정동 아파트에서 일곱 식구가 살고 있다. 아내는 아파트에서 시간나는 대로 청소일을 하고 있다. 딸애들이 직장에서 버는 돈은 저축을 하고 있다. 결혼 밑천으로 말이다. 고향에 다 팔지 않고 남겨두었던 논 2천 평과 밭 3백 평으로 식량을 하고 있다.

요즘 들어 호남대학은 학내 문제로 좀 복잡하다. 학교운영 문제로 의견충돌이 일어나 학장에게 폭력을 가했던 이사장이 물러난 뒤 지금은 그의 부인이 이사장으로 있다. 그 뒤로 학생들은 점거농성을 해왔다. 그런 중에도 학사일정은 진행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엔 학생들의 행동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건의사항이 있으면 건의해서 서서히 시정해 나가도록 해야지, 막무가내로 이사장만 물러가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건의하면 쉽게 들어주지 않는다 는 문제도 있다.

제 2캠퍼스 부지로 송정리에 사둔 땅이 있는데, 그것도 문제가 좀 있다. 그 땅은 당시 송정리가 광산군으로 있을 때 샀다. 그러다가 이번에 송정리가 광주직할시로 편입됨에 따라 땅값이 다섯 배 이상이 올랐다. 이렇게 되니까 당시에 땅을 팔았던 땅 주인들이 싸게 팔았다고 야단인 것이다. 금년 9월부터 착공하기로 했는데 못 하고 있다.

5·18 지정병원이 있어야 할 듯

올 봄에 YWCA에 부상자로 신고했다. 진작 신고하지 못한 건 교도소에 있을 때 강제로 시인했던 자술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군수사관들은 말했다. 밖에 나가서 함부로 얘기하면 군법에 의해 몇 년형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수감되어 있을 당시 시달렸다는 사실과 자술과정에서 구타당했다는 사실, 또 부상자들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심리적 불안감을 안은 채 살아왔다.

처음 나는 시청에 신고하러 갔다. 그런데 거기는 처리과정이 굉장히 까다로웠다. 당시의 물적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병원의사의 진단서와 촬영해 놓은 사진 등을 제출하라고 했다.

"당신 5·18 이후에 다친 것은 아니오?"

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면서 동사무소에 가서 부상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명단을 복사해 오라고 했다. 동사무소에 명단이 그대로 비치가 되어 있다고 했다. 동 사무소에 가보니까 보여주지 않았다. 당시에 명단을 말소시켜 버렸기 때문에 새로 만든 것은 틀린 게 많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동사무소에서는 그 명단이 일급비밀로 되어 있다고 했다.

"중앙에서 시달이 안 되었기 때문에 내가 공무원 생활을 더 하려면 도저히 보여줄 수 없어요."

라고 동직원이 말했다. 그런데도 시청에서는 허울좋게 복사를 해오라고 했던 것이다.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기는 했다. 매형이 지금 신안동 10통 통장으로 있는데 동장과 알고 지내는 처지였으므로 어떻게 해서 내 이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는 5·18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심하게 부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생활을 영위해 올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 일당으로 사는 사람이 큰 부상을 당했을 경우에 그것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의료보험카드도 없기 때문에 더욱 어려울 것이다. 돈이 없어 치료도 못 한 채 벌이도 없이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활안정자금으로 나왔던 3백만 원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겠는가? 은행에 넣고서 치료비로 꺼내 쓰다 보면 금방 바닥이 날 텐데. 이번 신체검사를 통해 등급을 매긴 뒤 거기에 따라 보상을 할 모양이다. 그런데 일률적으로 보상을 할 게 아니라 생활이 아주 어려운 사람들을 더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의료보험카드가 나오면 무상으로 치료를 해주겠다고 한다. 그것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특정병원을 지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병원에서 푸대접을 받기가 일쑤일 것이다. 그러면 의료보험카드가 있으나 없으나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는가? 또 진상규명이 먼저냐, 보상이 먼저냐 하는 얘기들이 나돌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생활이 아주 어려운 사람들 중에 보상을 어서 바라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진상규명이 확실히 된 후에 보상이 되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 고 나는 생각한다. (조사.정리 최정숙)

신군부 전두환는 광주의 피을 마셨다,
밤하늘의 별


 
  
  5,18광주 학살은 왜 광주에서 일어났을까?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3. 11:46
[스크랩] 학살은 왜 '광주'에서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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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 2006/03/27 (월)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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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은 왜 '광주'에서 일어났을까


[김욱 칼럼] 드라마 <5공>과 다시 짚어보는 세가지 의문점



▲ 드라마 <제5공화국> 가운데 한 장면. 김욱(wkimline) 기자

ⓒ2005 MBC-TV MBC 다큐드라마 <제5공화국>이 고통스럽게 25년 전 광주학살을 상기시킨다. 이 다큐드라마는 특별히 광주학살을 교과서 속 역사로만 알고 있던 신세대들에게 충격을 준 것 같다. 그러나 다큐드라마가 아닌 생존자가 직접 경험적 사실을 증언한다 해도 사태의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 증언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적 검열장치를 통과해 `해석’되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역사,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견해에 불과하다”(<김정일 코드>)고 말한 것은 광주학살에 대해서도 온전히 맞는 말이다. ‘5월 광주’는 지금도 부정 혹은 미화된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억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당신은 ‘5월 광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다음의 ‘이데올로기적 질문’을 통해 한번 확인해보기 바란다.

진상규명의 핵심은 발포명령자가 아닌 18-19일의 만행

질문1: 5ㆍ18 진상규명의 핵심은 21일 오후1시 도청 앞 발포명령자인가?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말한다. 물론 21일의 도청 앞 발포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20일 저녁 광주역 앞 발포에서 이미 2명의 희생자가 있었다)됐으므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규명대상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핵심을 21일의 발포명령자로 규정하는 순간 광주학살의 쟁점은 18~19일에 자행된 학살만행이 왜 일어났을까 하는 근원적 차원에서 도청 앞 발포가 신군부 측의 주장대로 ‘자위권 발동’인가 아닌가 하는 피상적 차원으로 이동해 버린다. 이런 접근 방식은 우리 정치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반인륜적 범죄문제를 비극이지만 경험해본 정치적 범죄문제로 그 역사적 이미지를 대체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은 “계엄군이 시민의 가슴에 대검을 찌르는 참혹한 장면…그것은 왜곡의 극치다”, “5·19 이전까지 계엄군 및 시민 쌍방간에는 어떠한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계엄군은 착검을 하지 않았다”(<오마이뉴스>, 2005. 6. 16)며 MBC 다큐드라마 내용 중 20~21일의 사실적인 발포묘사보다는 18~19일의 ‘은유적’인 총검살해묘사를 더욱 완강히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억지논리적 사연이 어찌됐든 이는 마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야기는 거짓말이다’는 선전을 듣는 것 같다. 당시 현장에서 전 과정을 직접 취재한 전 동아일보 기자 김영택은 18~19 양일간 생사불명으로 트럭에 실려 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제외한다 해도 ‘신원이 확인된’ 최초의 사망자는 19일 광주공원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맞아죽은 김안부(당시 36세)이고, “당시 검시과정에서 대검으로 유방이 찔려 숨진 여고생이 있었다”고 확인하고 있다. 이렇게 19일 오후가 되자 급기야는 넘치는 시신을 채 처리하지도 못한다.

“오후 6시쯤 대인동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에는 7, 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무등경기장 스탠드 아래쪽에는 10여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날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었다.”(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그렇기에 반드시 역사의 핵심 쟁점을 18~19일의 학살만행에 맞춰야 한다. 광주의 봉기는 18~19일 공수부대가 시위와 아무 상관없는 무고한 양민들을 상대로 끔찍한 학살만행을 자행(자세한 증언은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참조)하자 이에 맞서 목숨을 건 저항으로 시작된 것이다. 즉 그것은 과잉‘진압’이 아닌 문자 그대로 살육이었다! 21일의 도청 앞 대치와 발포, 그리고 이후의 무장투쟁은 전두환 군부가 자행한 학살만행의 필연적 결과였을 뿐이다.

'광주'는 '공포'를 위해 특별히 선택되었을 것



▲ 전두환 전 대통령 ⓒ2003 권우성


질문2: 18~19일의 학살만행은 왜 광주라는 특정 지역에서 일어났을까? 잘 대답하기 바란다. 이 대답에서부터 진정한 역사 이데올로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대답은 아주 쉽다. 우연이다. 전국적인 민주화운동과정 속에서 어디에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시공을 초월한 비극이 우연히 광주에서 일어난 것뿐이라는 것이다. 광주학살은 지역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역사의 미화 혹은 자위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우연이 아닌 의도적 만행이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의도적 만행임을 의심한다는 말은 광주라는 지역을 ‘공포’를 위해 특별히 선택했을 것으로 의심한다는 의미다. 광주라는 지역이 정말 선택된 것이라면 광주학살은 천인공노할 ‘지역패권주의문제’가 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에 이를 의심한다.

① 공수부대가 ‘경상도를 제외(!)’한 서울, 대전, 전주, 광주에만 투입되었으며, 서울에 배치됐던 제11여단은 18일, 제3여단은 19일 광주에 증파되기로 작전계획이 미리 짜여져 있었던 사실

② 18일 오후3시 공수부대가 아직은 본격적으로 광주시내에 투입되지 않은 시간에 정호용이 최웅에게 출동을 명령하면서 “매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느니 심지어는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뉘앙스의 유언비어가 나돈다”는 둥 광주학살의 사전각본을 그대로 발설한 사실

③ 도청이 시민군에 접수된 ‘단 하루 뒤(!)’인 5월 22일 계엄사는 즉각적인 중간발표를 통해 감금돼 있던 김대중에게 “국민에 대한 선동을 통해 변칙적인 혁명사태를 불러일으킨" 내란음모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결국 사형선고까지 받게 한 사실 등이다.(더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김대중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참조)

5.18은 전국적인 기념일이 될 수 없었다

질문3: 이후 5ㆍ18은 왜 전국적인 기념일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동문서답만이 존재한다. 예컨대 고려대 교수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광주민주항쟁은 보편적인 민주화를 지향하는 모든 사회 세력과 시민사회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고 대변함으로써 민주 대 반민주라는 대립축을 설정케 했던 역사적 계기였다”고 모범적인 대답을 한다.

왜 모범적인가? 그의 대답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대로 광주학살에서 지역문제를 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민주 대 반민주…역사적 계기였다”라는 최장집의 기술은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한 사회과학적 언설이 아니라 ‘그렇게 돼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적인 기도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관계에 대한 표현을 빌려 당위를 말하는 것은 일종의 동문서답이다.

나는 ‘5월 광주’를 영남패권주의 군사파쇼세력에 의해 자행된 호남 민중들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만행과 이에 맞선 저항투쟁이었으며 악성적인 지역구도가 고착화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세상에는 오직 계급모순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진보주의자가 있다면 이는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불온한 시선만이 5ㆍ18은 왜 전국적인 기념일이 되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 기도문이 아닌 사회과학적인 대답을 줄 것이다.

나는 박정희의 지역차별이 얼마나 심했든, 전두환 쿠데타의 성격이 무엇이었든 5ㆍ18이 실제로 최장집의 기도문과 같은 것이었다면 광주학살은 이후 최악의 지역문제로 고착화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광주학살 이후에 호남은 ‘김대중의 정당’을 통해 철저히 저항했고 영남 패권주의하의 우리 사회는 3당합당과 각종의 투표행위와 치욕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전두환의 정당’에 지지표시를 함으로써 5ㆍ18을 전두환 일당과 대한민국 간의 소통의 한계가 아니라 호남과 비호남(특별히 호남과 영남) 간의 소통의 한계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원죄의식에도 불구하고 ‘5월 광주’를 전국적으로 기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지금도 전두환은 전 국가원수 자격으로 대통령취임식에 초대되며 때때로 청와대에서 만찬을 즐기고, 전두환의 민정당을 계승한 한나라당은 건재하고, 전두환을 사랑한다는 ‘전사모’가 발호하며, 전두환의 아들은 호의호식하며 “청와대 문을 열고 들어간 업보가 이렇게 가혹할 줄은 정말 몰랐다”(<오마이뉴스>, 2005. 6. 20)고 어릿광대 같은 투정을 한다. 그들의 막강한 지지세력(참고로 호남에는 거의 없다)이 만들어내고 있는 요지경 속 우리 정치의 업보다.

누구나 의심하지만 모두가 덮어두려는 ‘5ㆍ18과 영남패권주의’ 과거사의 진실을 철저히 드러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호남과 영남 간의 왜곡된 이데올로기 대립이 아닌 ‘전두환의 추억’과 대한민국 국민 간의 정의로운 대립이 있을 때에만 지역문제는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무조건 덮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극우적 역사관에는 분노하면서도 ‘5ㆍ18과 영남패권주의’ 과거사는 무조건 덮는 것만이 ‘지역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이중적인 한국인들은 설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안젤라/ 너를 기다려♬

원본: 학살은 왜 '광주'에서 일어났을까

 
  
  1980년 광주의혁명/그날의함성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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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 2006/03/27 (월)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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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광주의 혁명 그날의 함성   




    아, 그 날의 함성들이여
    글/김 송 삼 2005,5,3....5,18을 생각하면서 작시..

    아, 그 날의 함성들이여
    5,18의 꽃다운 함성이여
    님들이 꽃피운 자리

    그 날은...
    하늘도 울고
    땅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아, 그 날의 함성이여
    민주화의 깃발이여
    님들이 광주에 민주화로 붉은 피 뿌린
    얼룩진 잔여들이

    오늘도
    도청에서
    금남로에서
    펄럭이며 노래부르고 잇다오
    님들이 총칼 앞에서 억압받다 군아 발로 짓 밟이며 노래부르다.

    아침이슬처럼
    소리 소문 없이 가버린 자리엔
    찬 서리 낀 자욱한 안개 걷히고
    오늘도 빛 고을에서는

    자유의 노래
    희망의 노래
    만주화의 노래를 끊임없이 계승하여 부르고 잇다오

    님들의 고귀한 희생은
    저 높은
    저 넓은
    하늘로 향기 되어
    자유의 날개 달고

    민주화의 물결은 온 몸짓으로
    하늘로 하늘로 솟구쳐
    향기 되어
    노래되어

    우리들의 작은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어여쁜 불꽃이 되어 펄럭입니다.


▲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오른쪽) 아래서 정치군인으로 성장한전두환(왼쪽) 역시 12.12쿠데타를 일으켜 광주의 피를 부르며 권력을 찬탈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중 항쟁 발발
1980년 5월 27일 계엄군 도청 진압 완료
1981년 3월 3일 전두환 12대 대통령 취임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1985년 5월 23일 서울 미 문화원 점거 사건
1988년 11월 18일 국회 광주 청문회 시작
1995년 7월 18일 검찰 5.18 학살 자들에 대한 공소권 포기 발표

이후 각계 각층의 항의시위 성명회 시국선언 발표

1995년 9월 29일 한총련 1백여대학 동맹 휴업
1995년 11월 30일 검찰 12.12및 5.18 특별 수사본부 발족
1995년 12월 19일 5.18 특별 법 제정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발표

전두환 ; 무기 징역
노태우 ; 17년 형
허화평 ; 등 징역 8년형
정호용 ; 등 징역 7년형
장세동 ; 등 징역 3년6월 최종 확정

1997년 12월12일 전두환 노태우 특별사면 복권됨
원본: 1980년 광주의 혁명 / 그날의 함성

 
  
  5월 그날이 다시오면... 5,18사건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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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그 날이 다시 오면…"
'그 때' 특전사 출신 목사가 고백하는 5.18 광주민중항쟁
이경남 / 경기 평택효덕감리교회 목사 , 2006-05-18 오전 10:59:00  

 


1980년은 우리 사회가 격동을 경험한 시대였을 뿐 아니라 나 개인적으로도 고통의 시기였다. 당시 나는 신학대학 졸업을 앞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지만, 성서의 요나처럼 내 짐을 감당하기 어려워 군대로 도피하는 길을 선택했고, 그런 나를 하나님은 마치 요나를 바닷물에 던지듯이 특전사라는 곳에 가게 하시고, 끝내는 5월의 광주 그 참혹한 현장에 던져지게 하셨다.

그 후 근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그 끔찍한 현장의 기억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입은 육체의 부상과 마음의 상처로 말미암아 될 수 있으면 그로부터 멀리 떠나 살려 했던 것이다.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새로운 각오로 시작한 신앙 생활과 농촌 교회의 목회 여건이 나 자신의 위치를 떠나 심각한 역사의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는 반드시 언젠가는 5월이 되면 광주를 찾아 그 끔찍했던 현장들을 돌아보며 이것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생각하고 싶었고, 또 망월동에 누워 있는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경의를 표하고 싶은 희망이 간절했다.


 



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79년 5월이었다. 공수 교육과 특수전 교육(구체적으로는 게릴라 침투나 사회 소요에 대비한 훈련)을 마치고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에 배치된 것은 9월 말 경이었는데, 다음 달 10월에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12 · 12 사태가 발생하면서 특전사 장병들은 당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던 신군부 세력의 기반이 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박정희 전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고 난 후 전쟁 경계령인 데프콘Ⅲ가 발동되자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공수여단에서 근무하던 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긴장된 군생활을 해야 했다. 더구나 12· 12 사태 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 의지가 드러나면서 일어난 1980년 봄의 수많은 소요와 혼란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될 공수 요원들의 생활과 훈련을 한없이 고달프게 만들었다.

특전사 주전투요원인 하사관들과 사병들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군부의 의도는 알 수조차 없었고, 단지 대통령이 죽고 나라가 혼란하니 전쟁의 위험이 있고, 그러니 빨리 이런 소요를 진압해야 한다는 단순한 안보 논리만을 믿고 있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정신 교육을 통해 대학생들에 대하여 들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모두 좌경용공 분자들이라는 것뿐이어서 자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광주에서의 끔찍한 학살을 서슴치 않게 한 심리적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피치 못하게 전개된 사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1979년 12월 30일경 종무식을 하면서 연초 3일간의 휴무에 들어갈 때 마지막 종회 시간에 들어온 중대장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공수 요원들은 점프(낙하) 수당으로 일반 보병 부대의 병사들보다 많은 봉급을 받고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새해부터는 특전 병사들을 200%의 봉급과 500%의 점프 수당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대우 향상을 약속한다는 것이었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들뜨고 즐거워하던 부대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당시 일병이었던 나도 그 이야기를 믿고 나의 봉급을 계산하니 꽤 큰 액수여서 군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아마 이러한 조치들은 특전 요원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친위대로 만들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의도한 선심이었을 터이다.

1979년 10월 내가 자대에 배치를 받은 이후 특전사 예하의 모든 부대는 정규 훈련을 제치고 소위 진압 훈련만 죽어라 하였다 그때 나는 왜 북한군의 위협이 있다면서 전쟁 대비는 하지 않고 데모 진압 훈련만 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1980년 봄이 되어서는 학생들의 시위와 세 김씨의 경쟁으로 인한 분열로 세상은 암담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 공수 요원들은 본격적으로 시위 진압에 나서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병사들은 강원도 깊은 산 속을 뒤지며 박달나무 같은 튼튼한 나무들을 베어다가 진압봉을 자체적으로 만들기 시작하였고, 시위 조기 진압과 정국의 안정이 시급하며 좌경 분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정신 교육을 되풀이해서 받았다.

그러다 강원도 화천에 있던 우리 여단이 서울로 대대적인 부대 이동을 한 것은 1980년 5월 초 무렵으로 기억된다. 이는 잠시 시위 진압을 하기 위해 출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장기적인 주둔을 목적으로 한 출발이었다. 매년 7, 8월이 되면 공수부대원들은 바닷가로 나가 몇 주씩 수영 교육을 받는데, 봄에 부대를 옮기면서 수영 교육준비까지 하고 가라는 명을 받았으니, 이는 시위를 진압하고는 부대로 복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비상 계엄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산한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가?

저녁에 부대를 출발하여 밤늦게 춘천역에 도착한 후 커튼이 다쳐진 열차에 몸을 싣고 새벽에 김포의 공수여단에 도착하던 일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나는 속으로 ‘6· 25 때 북한 군인들이 포장으로 가린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데, 이게 무슨 희한한 일이냐’ 하는 생각과 함께 도대체 알 수 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5월이 되자 공수 요원들은 신발끈도 풀지 못하고 전투복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며 언제라도 출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만 하였다. 또 비상 계엄이 선포되기 며칠 전인가는 특전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의 모든 부대에 1,500만 원씩의 하사금을 내려 우리 대대에서도 400만 원을 받아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며 큰 회식을 한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 대기하며 우리는 정신 교육을 받기도 하였는데, 강사는 부마 사태를 진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단호하게 시위를 진압하였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부대원들 역시 그것을 영웅시하는 분위기였다.

그 동안 몇 차례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취소되곤 하더니, 드디어 17일 저녁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군용차량에 탑승해 서울 시내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고 보니 동국대학교였고, 시간은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우리 중 일부는 학교 내에 있는 시위 학생들을 체포하러 다니고 나머지는 짐 정리를 중단한 채 방송을 듣게 되었는데,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이희성 씨가 나와 카랑카랑하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비상 계엄을 선포하며 주요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여단이 급히 광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다음날인 18일 오후5시 경이었다. 갑자기 다시 짐을 싸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사병들은 영문을 모른 채 제주도에 대대적인 게릴라들이 침투해서 그리로 간다는 막연한 소문만 듣고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차비를 차려야만 하였다. 일부는 먼저 비행기를 타고 출발을 하였고 나머지 부대들은 밤늦게 청량리역에서 기차에 올라탔다. 부대원들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또 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명령대로 행하여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런 생활에 익숙해진 까닭에 어느 누구도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 답답해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시간은 심장 박동과 함께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기차가 경부선을 달려가는 도중 부모님이 목회하시는 평택을 지날 때였을 것이다. 어두운 들을 지나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을 바라보는데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나는 가방 속에서 내무반에서 가지고 온 책 한 권을 꺼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읽곤 하던 <한국 청년에게 고함>이란 책이었다. 나는 그때 건성으로 그것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판국에 무슨 책을 읽느냐는 동료들의 핀잔이 귓전을 때렸다.

새벽 2시경에 도착해 보니 광주였고 우리가 들어간 곳은 조선대학교였다. 거기에는 이미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피로에 지친 우리는 대충 짐을 정리한 후 3, 4시경에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었을까? 아침 식사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출동명령이 떨어져 우리는 급히 단독 군장을 하고 총검을 꽂고 군용트럭에 탑승하여 소위 무력 시위라는 것을 하여야 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전라북도 금마에 있던 한 공수여단이 어제 광주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었고, 이에 강경하게 맞선 공수여단의 진압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상당수가 다치고 여론이 나빠지니까 그들을 대전인가로 빼고 우리를 대신 투입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대가 처음 광주에 도착한 19일 오전은 전날의 잔혹한 진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화가 난 군인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시장이나 거리 어디서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고 옷을 벗기고 진압봉과 총검으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의 공수 요원들은 흩어져 시위하던 학생들이 건물이나 주택으로 도망을 가면 쫒아들어가 거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데모대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다보니 생업의 현장에서 혹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애꿎게 잡혀 짓밟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속한 중대 병사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 한 젊은이를 찾아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얼굴과 머리에 피가 낭자하고 공포에 질린 그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빌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사정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은 옷을 벗기우고 군화에 채이며 머리를 땅에 박고 줄지어 앉아 있다가는 군용차량에 실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나 조선대로 온갖 학대를 다 받아가며 연행되어야 했다. 시장이나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가 도를 넘는 순간부터는 감히 대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눈치만 보며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 시내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지휘관들과 공수부대 요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한 마디로 ‘개새끼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감히 까분다’는 식이었다. 19일인지 20일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시내를 돌다 돌아와 보니 조선대 교정에는 군인들에게 잡혀 온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 넓은 운동장에서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짓밟히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어야 했고, 운동장 선착순을 수십 번씩 해야 했고, 그 중에서도 늦는 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에 채이고 맞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또 20일인가 그 다음 날인가도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헌병대가 쓰고 있던 체육관 건물에서 두 명의 젊은이가 하얗게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차량에 실려 오던 도중이나 아니면 그런 와중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매맞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군용 트럭으로 수송하면서 그 속에 몇 발씩 가스탄을 터뜨린 군인들도 있었다 하니, 그런 와중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그런 처참한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20일 오전 오후 내내 우리는 시내를 돌며 시위를 진압하였는데, 군인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직접 시위에 참여는 안했지만 사람들이 더욱 늘어 거리에 가득하게 모이던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 사태가 이 지경이니 궁금하기도 하고, 달리는, 감히 겁이 나서 시위 대열에 끼지는 못하지만 시위에 대하여 무언의 지지를 보내고 공수 요원들에 대한 증오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를 느껴서인지 어떤 군인들은 “전라도 들은 다 죽여야 해”라는 극언을 서슴치 않고 하기도 하였다. 우리들 가운데 다수는 이미 맹목적인 분노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날은 전날 같지 않게 그렇게 심한 폭력이 행사되지는 않았다. 사태가 너무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본 지휘관들의 자제 명령도 있었고, 또 군인들의 위압적인 진압으로 일시나마 학생들의 시위 대열도 흐트러져 본격적인 시위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저녁 늦은 시간부터 시위대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군인들은 자제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있을 뿐 무력 해산을 시키지 않았는데, 거리에는 시위대뿐 아니라 시민들의 숫자 또한 엄청나게 늘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을 포위한 군인들을 보며 '당신들 대한민국 군인들 맞느냐', '혹시 공산군 아니냐'고 묻기까지 하였다. 차량에 태극기를 달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이런 사태 앞에서 부대 지휘관들은 어떻게 할 바를 결정하지 못하고 열심히 상급 지휘관에게 무전으로 연락을 하며 작전 지시를 받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부대의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그대로 두고 조선대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런 모습을 본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군인들을 환송하는 일도 있었고, 시위대는 퇴각하는 군인들을 뒤따르며 군가를 불러 주기도 하였다. 지금까지의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고 순순히 퇴각하는 공수 요원들을 보고 군인 대열에 뛰어들어 군인들에게 악수를 신청하고 안아 주기도 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은 참으로 묘한 느낌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 사태가 심각한 양상을 보이면서 군인들은 작전상 철수를 하는 것인데, 마치 군인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좋아하다가 결국은 더 크게 멍든 게 아닌가하여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때 그토록 좋아하던 순진한 그 젊은이는 과연 살아남아 있을까?

우리가 퇴각하던 그날 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던 조선대 앞에서는 무서운 충돌이 일어났다. 아마 9시쯤이었을 것이다. 뒤따르는 시위대를 막기 위하여 군인들은 최루탄을 계속 터뜨리며 퇴각하였는데,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중 일부가 소방차를 탈취하여 군인들의 저지선을 뚫고 지나가는 위험한 일이 발생하였다. 또 밤하늘에 화광(火光)이 솟았는데 후에 듣기로는 세무서인가가 불에 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둡고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장갑차를 앞에 놓고 공포 사격으로 시위대를 막던 대대장은 무전으로 급히 실탄 사격을 요청하는 것 같았는데 허락되지 않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자꾸만 조르는 것 같았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시위대가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온 것은 조선대 내에 잡혀 있는 시민들을 풀어 달라는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과격한 일부 학생들이 소방차로 저지선을 뚫기도 하고 돌을 던지며 기습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어두운 밤에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은 군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하였고 장갑차를 앞세워 추격하며 잡히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하였는데, 아마 이 날 밤이 광주사태에서 본격적인 살륙이 시작된 날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고삐 풀린 상황 앞에서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들은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은 대학 앞 주택가였을 것이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성과 최루탄 연기에 주택가의 불은 다 꺼지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절규와 고함들과 비명들로 범벅된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거리에서 군인들에 의해 맞아 거의 초죽음이 된 한 시민을 발견하였고, 순간적으로 부대를 이탈하여 그를 업고 어느 민간인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했을까? 그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누구하나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한 골목을 들어서니 자그만 교회가 보이고 그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급히 문을 두드리니 한 노인네가 나오는데 키가 크고 인자한 기품이 있는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처음에는 놀라더니 이내 자신의 서재로 나와 함께 부상당한 사람을 인도하여 들어가게 하였다. 이미 거기에는 군인들의 추격을 피해 숨어 들어온 몇 명의 대학생들이 있었다. 공수부대원 하나가 군화도 벗지 않은 채 소총을 들고 들어갔으니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불빛에 사람을 내려놓고 보니 이미 혼수 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었는데 이건 말이 아니었다.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의 노동자 같았는데, 머리는 진압봉에 맞아 15센티 이상 벌어지고, 한쪽 팔도 맞아 부러졌는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밤을 그 목사님의 서재에서 몇 명의 대학생들과 함께 보내고 이튿날 새벽 혼자 부대에 복귀하였다.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나는 이로 말미암아 부대 내에서 상급자들과 지휘관들에게 맞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때 학생들이 살해된 동료들의 시신을 끌고 가며 처절하게 절규하며 울부짖고 노래하던 그 소리들을 듣는다.

나는 내가 업고 들어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또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 그 교회는 학일동에 있는 ‘광주 새교회’이고, 그 목사님의 성함이 정인보였다는 것, 그리고 당시 백발이 성성하셨던 그 목사님은 지금쯤 이미 고인이 되셨을 것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내가 부대에 복귀한 21일은 광주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날일 것이다. 나의 부대 복귀가 무전으로 지휘관에게 알려지고 나는 우리 부대가 쉬고 있던 상무대로 트럭을 타고 가게 되었는데, 군복에 피가 범벅되어 돌아온 나의 모습을 보고 직속 상관은 대노하면서 나를 심히 다루었지만, 그런 가운데도 나는 그가 내게 한 말이 가슴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밤새 나 때문에 애태운 것을 생각하면 화도 날 만하겠지만 그는 내가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이고 평소 문제를 일으키던 사람이 아닌지라 극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하였다. 그의 말인즉 비상 계엄하에서 부대 이탈이란 즉결 처형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밤새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다 아는데 여기는 전쟁터이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바로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말하며 나의 부대 이탈에 대해 얼마간 때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은 그 중대장과 다른 지휘관들의 처리에 일말의 고마움을 느낀다.

이 날 21일 오전, 우리는 걸어서 광주도청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우리 여단의 모든 병력이 집결해 있었는데, 밤새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시위대들이 격노하여 차량으로 무장하고 군인들과 무력으로 대치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군수 공장에서 탈취한 도시형 장갑차를 몰고 돌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광주 청문회 당시 부대를 지휘한 자가 이 부분을 거론하며 시위대의 장갑차에 의해 군인들이 희생당하면서 발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광주사태에 대한 법원의 최종적인 기록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

시위대가 장갑차를 몰고 도청 앞에 나타날 때에는 거리에 군인들이 서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도청 앞에서 우회전하여 빠져나가고 말았다. 장갑차에 의해 공수부대원이 치어 죽은 것은 당시 우리 여단에서 몰고 다니며 사격을 하던 군인 장갑차에 의해서이다.

나는 현장을 똑똑히 목격하였는데,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해 시위를 보장받으려던 사람들이 협상이 안 되니까 급기야는 차량을 몰고 돌진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다급해진 군부대의 장갑차가 급히 퇴각을 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치게 되고, 그가 현장에서 즉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장갑차의 무한궤도 밑에 하반신이 깔린 그 병사의 상체가 위로 들려지며 입에서 붉은 피를 쏟아내던 처참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특전사에 배속된 지 얼마 안 되는 신참내기 병사였다.

 



충장로 거리에서 태극기를 들고 파이프나 몽둥이로 무장을 하거나 트럭이나 버스를 탄 시민들이 군인들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너무도 사태가 위험하고 다급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고 당황하던 부대 지휘관들의 안쓰러운 모습도 생각난다. 나는 비교적 대치선의 뒤에 있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덜 받았으나, 아마 최전방에서 시위대와 가까운 거리를 두고 대치하던 군인들은 그들이 차량으로 돌진하려 할 때에 매우 큰 불안에 떨어야 했을 것이다. 하늘에서는 계속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는 헬기의 방송이 나오고 학생들의 구호와 노래 소리는 처연한데, 천여 명의 특전 요원들과 수만의 시위대의 일전을 앞둔 이 일촉즉발의 다급한 상황을 그 앞에서 직접 서 본 사람이 아니면 누가 짐작이라도 할까?

이런 일이 발생하기 전 비교적 아침 이른 시간에 있었던 일도 기억이 난다. 도청 분수대 앞에서 시위대와 군인들이 대치를 하고 있는데, 시내버스를 탄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시위대를 뚫고 나가 군인들에게 위협적으로 돌진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놀란 군인들이 흩어지고 그 차량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게 되었는데, 이에 화가 치민 군인들은 분풀이라도 하듯 갑자기 길가로 뛰어들어 지나가는 시민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다. 마침 고무신을 신고 잠바차림으로 길을 지나던 40, 50대의 남자가 군인들에게 걸려들었고 그는 금새 진압봉에 맞아 기절하였다.

주변의 사태는 점차 술렁이며 다급해져 갔다. 나는 아무래도 그대로 두었다가는 그 사람의 생명이 위험할 것 같아서 급히 뛰어들어 그를 안고 피신시키려 했다. 덩치가 큰 사람이었고 내 힘만으로는 부쳐 쩔쩔매고 있는데 다른 대대의 중사 한 사람이 뛰어들어 도와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수백 명의 공수 요원들이 이를 보았고, 우리는 그를 끌고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후 시민들에게 이 사람을 좀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왔다. 그때 같은 중대의 상급자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내게 대검을 들이밀면서 '너 죽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너는 아군이냐 적군이냐?'

그때 그 질문은 내게 부질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고, 그런 내게 그는 한 번만 더 그런 짓을 하면 너부터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우리가 부상당한 사람을 질질 끌어 그늘지고 안전한 곳에 대피시킨 후 멀리 서 있던 시민들을 향해 보살펴 달라는 손짓을 하고 돌아올 때, 차마 군인들이 두려워 가까이 오지는 못하지만 그들 중에는 우리에게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던 사람들도 있지 않았던가.

전일빌딩으로 기억되는데, 그 앞에서 대치할 때에 청년 한 사람이 창문을 열고 군인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일도 있었다. 화가 난 군인들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잠시 후에 그는 피가 낭자한 채 끌려오게 되었는데, 대검을 목에 대고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군인들에게 창백하게 질려 살려 달라고 애걸하던 그의 공포에 질린 눈과 모습 또한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때의 나는 일병 계급의 신분으로 격노한 상급자들의 살해 의지를 느끼면서 감히 말리지 못하였다. 끌려간 그 사람은 그때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21일의 도청 앞 발포사건은 돌진하던 시위대 차량들로 인해 퇴각하던 군인 장갑차에 의해 우리 대대에 속한 병사가 깔려 죽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일어났다. 장갑차가 밀려나면서 공수요원들의 저지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도청 앞 광장은 돌진하는 시위대와 그들의 차량들로 채워지게 되었는데 다급해진 군인들은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나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발포와 함께 시위대는 흩어졌고, 우리는 도로에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어야만 했다.

내 기억에는 그때 장갑차가 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캘리버50 기관총으로 무수하게 사격을 했다. 그것은 단순한 위협 사격이 아니고 분명 실제 조준 사격이었다. 어떤 자는 도청 앞에서 시위대에 의해 발포가 시작되어 대응사격을 하였노라고 말하기도 한 모양이나, 내가 알기로는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무력으로 대응한 것은 이런 일들에 의해 군인의 사격이 시작된 이후의 일이지 먼저 하였거나 함께 사격으로 맞대응한 것이 아니다.

그때는 수백 명의 군인들이 도청 앞 도로에서 무방비 상태로 엎드려 있었는데,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시위대로부터 총격을 입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만약 그랬다면 노출된 우리 중에 하다 못해 다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더구나 오후 4시쯤 도청에 있던 우리 여단의 병사들이 조선대로 퇴각할 때 도로를 걸어서 퇴각하였는데 만약 이때에 시위대가 총을 가지고 사격을 할 수 있었다면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

도청에서 조선대로 퇴각한 후 우리는 곧바로 긴급한 철수 명령을 받았다. 이 때에 조선대 광장에서 장갑차가 학교 주변의 주민들과 아이들, 그리고 호기심에 찬 구경꾼들을 향해 계속해서 사격을 해댄 것도 기억이 난다. 철수하는 군인들을 보호하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그랬던 것 같은데 여기서 실제로 조준사격을 하였는지 아니면 위협 사격으로 사람들을 흩뜨리기만 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급히 짐을 챙겼고 저녁 7시 경 어두울 즈음 급히 조선대를 떠났는데, 주요한 문서나 장비들을 트럭에 싣고 떠나야 했던 본부대 병력이 시내를 빠져 나오다가 시위대의 총격을 받고 몇 사람이 죽는 최초의 군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무조건 앞사람만 따라 밤새 걸었고 그 다음날인 22일 오전 11시쯤 되어서야 도착한 곳이 무등산 깊은 골짜기임을 알았다. 거기에는 우리 여단 전 병력뿐 아니라 확실치는 않으나 다른 여단의 병사들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거기서 수송기를 통해 보급된 식량 및 일인당 580발의 실탄 그리고 수류탄이나 가스탄 등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 모두는 지친 몸을 쉬며 작전 명령을 기다렸다. 우리는 야만의 숲에 갇힌 맹수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산중에서는 아마 포로로 잡아 왔던 대학생을 총살하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 일을 나는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을 목격한 다른 대대의 병사 하나가 내가 아는 후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왜 이런 부대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더란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당시 그 일은 부대 내에서 소문으로 돌기도 하였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후 공수부대가 머물렀던 그곳에서 총상을 입은 유골이 발견되어 그것의 증거가 되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다른 대대의 한 중대가 국도변에서 매복을 하다가 시위대 차량을 발견하고 집중 사격을 하여 많은 숫자의 학생들을 사살한 일도 발생하였는데, 당시 그 버스에 탔다가 유일하게 생존하여 후에 그 일을 증언한 한 여학생은 군인들이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을 하나하나 확인 사살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무등산 골짜기에서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을 머물렀고, 그 후 도청이나 광주 주요 시설들에 대한 탈환 작전 명령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사이 이상하게도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가는 취소된 적도 있었다. 아마 많은 희생자를 내야 하는 최종 진압 작전에 대해 한미 군부 내에서 이견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보는데, 나는 아주 오랜 후에야 전쟁에 대비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데프콘Ⅲ의 상황에서는 군 작전지휘권이 한미연합사로 넘어가고 미군측의 허락과 동의 없이는 어떤 군사적 행위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음을 알았다.

무등산에서 멀리 어둠에 잠긴 광주를 바라보는 것은 처량한 일이었다. 이미 진압군들은 시내에서 다 떠났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밤만 되면 콩볶듯하는 총소리가 밤새 끊이지를 않았다. 23일 밤인가 시내 진입 작전 지시가 있었다가 취소된 적이 있었고, 그때 피로에 지친 동료 병사들이 텐트에서 골아 떨어져 자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연이은 작전과 행군으로 우리는 지쳐 있었다. 물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면도도 하지 못한 채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한 순간 뒤에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를 생각지 못하고 그저 배불리 먹고 씩씩대며 자던 그 단순한 얼굴들…

나는 아무래도 임박한 시내 진입과 주요 시설 탈환을 위한 작전에서 큰 희생자가 나고 또 내 생명도 위태로울 것 같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고, 텐트에서 나와 좀 떨어진 한적한 바위 밑에서 기도를 하였다. 너무 피로했고 또 단조로운 군생활에 아둔해져서인지 또렷한 의식을 차리기 어려웠지만, '하나님, 제가 그래도 목사가 되겠노라고 신학대학을 다니던 사람인데, 이제는 무죄한 사람을 죽이여야만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제가 언제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처지가 되었으니 나로 이 궁지를 벗어나 죽이지도 말고 죽지도 말게 도와주십시오' 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당시 계절은 신록의 봄으로 산하는 한없이 푸르렀고 생명감으로 가득찬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4일, 이 날은 나뿐 아니라 많은 병사들과 시민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요 처참한 비극의 날이 된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갑자기 철수 명령이 떨어졌는데, 산 속에 비트를 파고 숨겨 논 배낭과 장비들까지 다 가지고 간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투나 작전을 하기 위한 출동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철수하는 것임을 뜻하였다. 광주 외곽에 있는 송정리 비행장으로 새 거처를 잡고 아마 거기에서 최종적으로 시내 탈환을 위한 작전을 시행하려고 한 모양인데, 천여 명의 병사들이 수십 대의 군용 차량에 탑승하여 장갑차를 앞세우고 비행장으로 출발한 것은 오후 1시경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우리들은 개인당 580발의 실탄과 수류탄이나 가스탄 등의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시위대의 기습에 대비하여 실탄을 장전하고 경계하며 차량 이동을 하게 되었다. 국도를 따라 한참을 이동하던 중 간간이 민간 마을을 향해 사격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곳은 광주 시내로부터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고 마을의 주민들이나 아이들도 시내의 소요와는 무관하게 평소처럼 모내기를 하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그런 곳이었는데, 지금도 나는 왜 군인들이 그런 마을을 지나며 사격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두발씩 들리던 총성은 이내 콩볶는 듯 하는 요란한 소음으로 바뀌었고 논에서 모내기를 하던 농부들이나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어린이들,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이 총소리에 놀라 혼비백산 흩어지고 자빠지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군인들의 말로는 시위대가 나타나 그랬다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당시 사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실탄 장전이 된 소총을 가진 군인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본능적으로 사격을 해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후에 알고 보니 이런 와중에 애꿎게 총에 맞아죽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여럿이었다.

잠시 후 송암동이라는 곳에서는 그러한 것보다 더 끔찍하고 내가 경험한 광주사태 중 가장 처참한 일이 벌어진다. 광주 보병학교 일개 중대가 무반동포로 무장하고 매복하다가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 차량이 나타나자 이를 시위대 차량으로 오해하여 사격을 해대는 일이 발생한 것이 그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었고 5분 내외의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그때 나는 도대체 어떻게 군인들이 평온한 주택가를 향해 사격을 해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며 몸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다가 머리 부분에 총상을 입는 일을 당했다

 



보병학교 병사들은 무반동포로 앞서 가던 장갑차를 명중시켜 깨어버렸고 뒤따르던 차량들을 향해서도 계속 공격했다. 갑자기 폭발음들이 사방에서 나며 총격이 가해 오자 당황한 우리쪽 군인들은 사격으로 대응하거나 차량에서 뛰어내려 급히 길 옆 도랑으로 피신했다.

내가 처음 무언가 내 신체에 총격이 가해진 것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총격을 입고 무너지듯 힘없이 쓰러졌다. 분명 머리 뒷부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아련히 의식하였는데, 그토록 갑자기 찾아온 죽음으로 인하여 공포와 허무함이 가슴 가득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내게 닥친 것일까? 나는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또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가족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슬픔이었는데, 나의 죽음이 알려질 때에 비탄에 빠져 괴로워할 그분들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고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아프게 느껴졌다.

나는 나 자신의 실상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희미하나마 의식이 있었고, 만약 죽더라도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내가 어디에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었고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나를 확인했다. 머리 뒤를 만졌는데 피가 낭자했다. 그리고 그 다음 얼굴을 더듬었는데, 이는 만약 총알이 머리 뒷부분을 때리고 관통했다면 앞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얼굴을 더듬어 보았으나 구멍은 없었고 뒷머리 부분의 상처도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멀리서 손짓하는 불빛처럼 깜박였다. 차 안에는 나 홀로 누워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차에서 뛰어내려 도피하는 동료들이 보였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폭발음과 총격 소리, 무엇보다 살아나려면 빨리 차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몸을 일으켜 차량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내 몸이 천만 갈래로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나뒹굴게 되는 두 번째의 변을 당했다. 아마 무반동포에서 발사된 포탄이 내 주변에 터진 것이었다. 폭발에 휩싸이는 순간 나는 온몸이 큰 방망이로 맞고 찢기는 듯한 큰 고통을 느꼈고. 다가온 죽음 앞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리치며 울부짖어야만 하였다.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온몸이 파편에 뚫리고 찢겨 피투성이가 되고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나는 땅에 엎어져 한없이 '아! 하나님, 아! 하나님' 하고 절망 가운데 부르짖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의 내력도, 신학생이라는 나의 신분도 한 순간 다가온 죽음의 공포보다 더 절실히 하나님을 찾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이 조금 지난 후 차츰 의식이 돌아왔는데 주변에서는 여전히 포탄이 터지고 요란한 총격이 오가고 실탄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러고 있다가 내가 벌집처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상호 오인으로 인한 교전은 잠시 후 멈추게 되었고 평정을 찾은 후 사태 수급이 시작되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동료들의 시신이 즐비하고 그 중에 어떤 것은 뼈가 허옇게 드러난 것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지난 21일 아침 내 앞에서 어젯밤 스무 명을 찔렀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던 옆 중대의 하사관도 있었다.

나는 그저 땅에 엎어진 채 가쁘게 숨을 몰아 쉬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무래도 호흡에 이상이 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지고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입만 하늘을 향해 벌어지는데 이제 영락없이 죽는구나 하는 두려움이 재차 엄습하였다. 나는 계속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살려 달라고 애걸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 때문이었을까? 잠시 후 호흡이 다시 돌아오고 비로소 나는 내게 벌어진 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를 돌려 몸을 살펴보니 오른쪽 팔꿈치는 피가 흐르고 파편이 박혀 움직일 수 없었고 왼쪽 겨드랑이와 심장 사이에도 피가 홍건히 배어 있었다. 이마에서도 피가 흐르고 왼쪽 다리는 피에 절었는데 부상이 큰지 극심한 통증만 느껴질 뿐 몸은 아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겨우 오른쪽 팔만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는데 얼마나 목이 타던지 조심조심 수통을 꺼내 약간의 물을 마시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다행히 실탄이나 파편들이 몸의 중심부를 지나지 않아 살 것 같다는 생각을 들었다. 몸이 포탄의 파편들에 휩싸일 때 천상의 날개가 나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측은하게 생각하여 도와주시려 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처참히 죽어가야 했던 사람들은? 그때 나의 마음은 정확히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정신이 좀 든 후 나는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옷을 다 찢기고 벗기운 채 병원으로 후송될 때까지 누워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에이 씨팔! 이런 개죽음 당하자고 군에 왔단 말인가'하며 내게 그런 원치 않는 불행을 강요하는 알 수 없는 세력들을 향하여 욕을 퍼붓기도 하였다.

내가 알기로 이 일로 말미암아 9명의 군인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2명은 병원에서 죽었으며, 40명 이상의 병사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동료들의 죽음과 부상을 목격한 군인들이 어리석고 무모한 분노에 사로잡혀 주변 마을을 찾아가 동네 젊은이들과 가축들을 쏴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안다. 도대체 시내와는 동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의 주민들과 군인끼리의 오인 사격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아마 그런 만행을 행한 일부 군인들은 광주 사람은 곧 적이라는 적개심으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저질렀을 것이다. 앞서 기술하지 않았지만 도청 앞에서 장갑차에 군인 한사람이 죽게 되었을 때, 그와 가까운 하사관 한 사람이 부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난사를 하였노라고 으쓱대던 기억이 겹쳐진다

당시 시위를 하던 학생들을 끝없이 좌경용공 분자들로 가르치던 군대의 정신 교육, 아니 세뇌 교육의 결과란 이토록 무서운 것인가? 나는 그런 일을 서슴지 않았던 같은 부대의 상급자들을 아는데, 그들은 지금쯤 그런 자신들의 만행에 대하여 후회하는 마음이라도 가질까? ‘화려한 외출’이라고 명명된 그날의 비극은 그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장갑차가 깨지면서 그 속에 타고 있던 6명 중 3명이 죽고 대대장을 비롯한 3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그 중에는 전역을 열흘도 안 남기고 죽은 억세게 재수없는 병사도 있었고,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사병들과 시위대들에게 난폭하게 행동하던 참모 한사람도 있었다. 또 비록 진압군의 일선 지휘관으로서 시위 진압의 책임을 떠맡고 원치 않는 학살의 악역을 맡기는 하였으나 부대 내에서는 투철한 군인 정신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천주교 신자인 대대장은 왼쪽 팔이 잘려 나가는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긴급히 수십 대의 헬기가 출동하였고 피해의 정도가 심한 순서대로 나는 두번째 헬기로 광주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송되기 직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하사관 한사람이 복부에 관통을 당하고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철모에 하나 가득 피가 담겨져 있던 그는 숨을 몰아쉬며 살려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평소 성품이 온순하여 부대 내에서도 하급자들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병원에서 수술 도중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병원으로 호송된 나는 응급 처치를 받고 피로에 지쳐 깊은 잠에 떨어졌는데 한참 만에 일어나 보니, 그 다음날, 즉 5월 25일 오후 4시경이었다. 거의 24시간 이상을 잔 것이다. 그때에 병상에서 꿈결에 듣던 라디오 소리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한 채 계속 행진곡을 틀며 시위대에게 투항을 권고하는 방송이었고, 그 소리는 처참한 일을 목격한 내게 더 끔찍한 사태를 예고하는 것 같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병원에는 시위 도중 군인들에게 부상을 입은 학생들이나 민간인 부상자들도 격리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조선대학교 심리학과 4학년 여학생은 등에 총을 맞고 누워 있었고, 그녀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시위에 참여하게 된 것은 군인들에 의해 맞아 죽은 시신을 보고 나서였다고 했다. 마치 튀김가루를 묻혀 튀기듯 사람의 시체를 페인트로 범벅해 놓은 것을 보았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당시 군에서는 시위 주동자를 잡기 위해 화염방사기에 페인트를 넣고 쏘아 맞힌 다음 잡겠다는 계획을 세운 바 있었는데, 아마 그 사람이 그렇게 하여 희생된 사람이었으리라.

나의 광주에 대한 회고는 여기서 끝난다. 광주사태가 진압된 뒤 나는 연고지를 찾아 대전 통합병원으로 이송되어 광주를 벗어나게 되고, 그 후 입퇴원을 반복하며 9개월여의 병상 생활을 하게 된다. 후에 부대로 복귀한 후 광주사태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한 27일의 작전에 참여한 병사들의 이야기를 간혹 듣기도 하였지만, 그 끔찍한 전말에 대하여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바는 없다. 단지 최신의 무기로 무장되고 고도의 훈련을 갖춘 최정예의 공수 요원들을 맞아 카빈과 M1 소총으로 무장하고 단지 의분과 애국심 하나만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가며 도청과 시내를 사수하려던 시위대의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무모함에 한없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애초부터 수적으로나 전투력으로나 상대가 될 수 없는, 죽기를 결심한 행위일 뿐 구차히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27일 새벽 무사히 시내 탈환 작전을 마무리한 특전사가 승리자인 양 그 전공을 자랑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일국의 최정예 군부대가 아무런 훈련도 작전도 없이 급조된 시민들과 학생들로 구성된 소수의 시위대를 무참히 학살하고 이겼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듣기로는 막상 군인들이 진입하였을 때 시위대는 차마 총도 쏘지 못하고 망설이는 어린 학생들이었다는데…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다 보면 마지막 묘역의 좌편에 광주에서 죽은 20여 명의 군인들의 묘비가 있다. 바로 그 옆에는 6·25 때 전사한 국군 장교들의 묘비가 있고, 거기에는 1950년 6월 26일 의정부에서 전사한 나의 큰아버지 묘비도 있다. 나와 내 가족들은 매년 현충일에 그곳을 들르면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동료들의 묘비도 돌아본다. 한국 전쟁의 와중에서 4형제 중 세 명을 잃은 불행한 일로 인해 평생을 슬퍼하는 부친께서는, 바로 그 옆에 너도 묻힐 뻔하였다면서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던져졌다 기적같이 살아난 자식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신다.

 



과거 5공, 6공 시절에는 광주에서 죽은 병사들의 묘비에는 언제나 그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국난을 극복한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특전사 전역 병사들의 모임도 있어 왔지만, 군부 세력이 몰락하고 광주에서의 만행과 그들의 비행이 천하에 알려진 뒤로는 그런 모임조차 흐지부지 사라지고 다만 사랑하는 자식들의 애꿎은 죽음을 슬퍼하는 유족들의 조문만이 겨우 이어질 뿐이다. 내가 잘 아는 그들의 묘비에는 일병이었던 사람이 상병으로, 중사였던 이들이 상사로 진급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도대체 이것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광주에 투입되어 그저 시키는 대로 하다가 고귀한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그들의 불행과 가족들의 비극이 보상될 수 있다는 말인가?

광주의 그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 후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되었던 광주사태는 이제 신군부 세력에 용감히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으로 명명되었고, 그날 죽어갔던 광주 시민들은 폭도라는 부끄러운 이름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되찾기도 하였다. 또 그때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 하여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가기도 했던 사람들은 이제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되었고, 반대로 이들을 탄압하던 당시 신군부 세력들은 그들의 죄상과 함께 재임 기간 중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감옥에 다녀오기도 하여, 사람들은 이제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었나 하는 것쯤은 다 알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그 참혹했던 역사의 비극은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매년 5월이 오면 나는 광주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지난 20년 가까이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차마 그곳으로 발을 옮기지 못하였고, 올해도 역시 그랬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5월의 광주를 찾아가고 싶다. 가서 그날 어둠이 내린 하늘을 향해 부르짖던 의인 아벨과 선지자 스가랴의 피의 절규처럼 울려 퍼지던, 지금도 하늘과 땅에서 울려나오고 있을 죽어간 자들의 슬픈 목소리를 듣고 싶다.

나 혼자만이 아니다. 그때에는 사랑하는 자식을 죽음의 구덩이에 보내고 그로 인해 한없이 마음 태우셨을 노년의 부모님과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도 함께 가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나의 총명한 자녀들에게 광주의 아픔은 물론이고 죽은 자들의 진실과 사악한 권력의 위험을 가르치고 싶다.

끝으로 아직도 살아서 지난 날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준동하는 전두환을 비롯한 5공의 권력자들에게, '이 나라에서 당신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자숙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 사진을 제공해준 518기념재단에 감사합니다.
(뉴스앤조이/코리아포커스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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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새 작전(4)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1. 17:27

2007년 3월 21일 (수) 08:53   오마이뉴스

박희도 사령관, 작전명 바꾸라 명령25년째 비문에도 '대침투 작전'으로

19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제주로 먼저 떠난 53명의 군인들이 모두 사망한 이 사고는 역사 속에 묻혔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유족은 대부분 고인이 됐거나 연로하지만, 여전히 25년 전 사고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부터 취재해 온, 일명 '봉황새 작전'으로 불리는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처리 과정 등을 모두 4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장윤선·김도균 기자]

"너무 답답했어요. 1982년 2월 7일 7787부대 휴게실에 있는데 무조건 기다리라고만 하는 거예요.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 설명도 안 해주는데,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어요. 부대 상황실 유리창을 깨고 들어갔지요. 뭐라도 좀 알려면 어쩔 수 있나요?"

큰애는 세 살, 작은애는 갓 돌이었다. 1982년 2월 5일 저녁, 아이들 밥을 주고 있는데 TV뉴스에서 'C123 제주도 인근서 추락'이라는 단신이 자막으로 처리됐다. 남편이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1982년 1월 15일부터 2월 1일까지 17일 동안 지속된 스키훈련 직후 남편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또 전두환 대통령을 경호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 야속했다. 하지만 군인의 아내로서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쉼 없는 훈련의 연장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남편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는데, 그 뒤로 남편은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 19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에서 추락한 C-123 공군 수송기 잔해.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 1] 1982년 2월 6일 서울 거여동 특전사령부

6일 아침부터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 위병소에서 군 당국의 구체적인 상황보고가 진행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유가족들이 의자를 걷어차며 울분을 터트리는 아비규환 속에서 애들 엄마로서 할 일은 단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무엇인지 군 내부 서류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전두환 독재체제가 끝나면 최소한의 진실규명을 할 수 있는 '거리'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죽을 각오를 하고 결심했다.

팔뚝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줄도 몰랐다. 부대 상황실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까만 철로 묶인 상황일지를 들고 나올 때까지. 지난 14일 밤 서울 강남에서 만난 이영숙(가명)씨는 당시 부대에서 들고 나온 상황일지를 보는 순간, 참담함에 젖었다고 했다.

군대가 이 비행기사고의 원인규명과 현장조사에 앞장서기는커녕 도리어 작전명을 바꾸고 이 사고를 축소, 은폐하려고 한 점이 소름끼쳤다. 군인 가족으로서 평생 군대와 함께 살기로 작정했는데, 철저하게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군인들이 무려 53명이나 목숨을 잃었는데도 오로지 전두환의 안위만 걱정하는 군대에 치가 떨렸다. 이씨는 25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주스 컵을 잡고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멧세지

발신 사령관 제1호

수신 707대대장

참조

제목 훈련명칭변경

내용 1.

금번 훈련은 동계특별훈련으로 호칭을 하니 전 장병에게 주지시키기 바람

송 수신시각 08 : 45

1982년 2월 6일

확인자 계급 중사 성명 김○○ 인


1982년 2월 6일 아침 8시 45분, 박희도 당시 특전사령관이 김두청 707대대장 앞으로 보낸 '당일 첫 번째 메시지'다. 박 사령관은 이 메시지를 통해 전두환 대통령의 경호를 위한 '봉황새작전'을 동계특별훈련으로 바꿔치기하고, 변경된 작전명을 전 장병들에게 주지시키라고 하달했다. 사고발생 직후, 박 사령관이 작전명을 바꾸라고 하명한 까닭은 뭘까.

그 전날(5일) 오후 1시 30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출발한 군수송기 C123이 실종된 지 17시간째.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머리를 박고 추락한 이 사고기체를 찾지도 못한 상황에서 박 사령관은 작전명부터 바꾸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시라도 전원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진다면 전두환 대통령에게 누가 될지 모르는 '봉황새작전'은 아예 없었던 일로 처리하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박 사령관은 1982년 2월 6일자로 사고기에 탑승했던 특전대원 가족들에게 긴급편지를 보내 위급한 상황을 전달하면서 '대침투작전 훈련 중 추락사고'를 당했다고 못 박았다.

봉황새작전이 군 내부는 물론 유족들에게까지 완벽하게 삭제된 상태로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 25년 동안 제주 봉황새작전은 한국사회에서 아예 없었던 일로 치부됐다.

▲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1982년 2월 6일 오전 8시 45분 김두청 707대대장에게 훈련 명칭 변경 메시지를 보내, '봉황새 작전'을 '대간첩 침투작전'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박희도 "아드님의 거룩한 희생은 육군사에 길이 빛날 것"

박 사령관은 2월 6일자로 유족들에게 첫 번째 안내문을 보냈다. 박 사령관은 이 글에서 "우리는 귀댁 아드님과 함께 멸공 최일선에서 피땀 흘려 노력하여 국가와 민족보위의 숭고한 사명을 수행해왔다"며 "지난 2월 5일 불행하게도 대침투작전 훈련 출동 중 기상 불량으로 이상기류에 휘말려 제주도 지역에서 불의의 추락 사고를 당했다"고 밝혔다.

이어 "사고소식을 접한 즉시 수색구출대를 편성하여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생사를 알 길이 없다"며 "훌륭한 아드님의 평소 숭고하고도 거룩한 뜻에 따라 놀라움과 고통을 참으시고 일단 기다려주시면 추후 자세한 소식을 알려드리겠다"고 전했다.

또한 박 사령관은 1982년 2월 27일 특전사 유가족들에게 공문을 보내 "아드님과 남편께서 당하신 희생은 우리 조국과 민족을 위한 거룩한 희생으로 그 높은 뜻과 함께 육군사에 길이 빛날 것"이라며 "뜨거운 조국애와 불타는 충성심으로 승화돼 조국과 민족을 위한 활화산의 원동력이 될 것을 확신한다"고 추앙했다.

전두환 대통령 경호를 위한 작전이었다는 말은 쏙 빼놓고, 대간첩침투작전이라고 훈련명칭까지 거짓말로 변경해놓은 박 사령관은 53명의 억울한 죽음이 조국과 민족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었다고 추켜세웠다.

심지어 제주도 한라산 사고현장에 세워진 원점비 비문에도 '대침투작전 훈련 중 이상기류로 군수송기가 추락, 장병 53명이 순직하였다'고 기록했고, 영령들을 기리는 충혼비 비문에도 마찬가지로 '대침투작전 훈련'이라는 거짓말을 음각해 넣었다. 군 당국은 25년째 '대침투작전'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제주 2·5 C123 추락사고'의 실체적 진실을 철저히 감춰왔다.

무엇보다 '제주 2·5 C123 공군수송기 추락사고'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유가족들은 25년째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된 사고조사보고를 전달받지 못하고 살았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은 가슴을 치며 의혹이 많은 사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982년 2월 9일 군 당국이 마련한 장례식을 올릴 때까지 사고원인이 뭔지, 어떻게 하다 발생한 사고인지, 주검 수습은 제대로 됐는지, 사고현장은 정확히 어딘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군 당국은 무조건 유족들을 감시하기 바빴죠. 당시 장례식 사진을 꼼꼼히 보세요. 유족 1명당 군인 서넛이 달라붙어 꼼짝도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유골함도 만지지 못했어요. 먼발치에서 맥없이 바라볼 뿐이었죠.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겁니까."

"군대는 시신 세 포대와 함께 유족을 호텔에 감금했다"

 
▲ 1982년 5월 15일, C-123 공군수송기 추락 사고 현장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 어지러이 널린 비행기 잔해 속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영숙씨는 25년 전 군 당국이 사고발생부터 현장수습, 사체처리 등 사후관리까지 전 과정을 '대강' 처리했다고 비판했다. 군이 단 한 번도 사고원인규명, 현장수습, 사체처리 등 3대 사안에서 설득력 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대가 우릴 바보 취급했습니다. 100일 위령제 직후 한라산에서 본 사고현장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습니다. 군대는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정부미 포대자루로 3포대의 시신더미를 찾은 유족들을 제주공항 근처 호텔에 1주일 동안 감금했습니다."

이씨의 증언은 충격 그 자체였다. 1982년 5월 15일 100일 위령제 이후 한라산 사고현장에서 발견한 사체더미가 정부미 포대자루 1개가 아니라 3개였다는 증언이 새롭게 나온 것. 이씨는 당시 사고현장에서 찾은 시신더미 세 포대자루를 유족들과 함께 끌고 내려와 서울로 올라올 생각이었으나, 당시 군인들의 방해공작으로 신제주의 한 호텔에서 시신더미와 한 방에서 1주일을 함께 지냈다고 털어놓았다.

"비닐로 이중삼중 겹겹이 싸도 시신이 썩어가는 냄새는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유족들은 그 시신들과 함께 한 방에서 생활했죠. 몇몇 유족이 군인들과 합의해 제주 화장터에서 화장한 뒤에야 서울로 유해를 모셔올 수 있었지만, 그때 나는 이 시신더미를 앞세우고 서울 시내를 행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전두환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분이 풀리지 않았고, 이 억눌린 분노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이씨는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해서야 맨발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디서 신발을 잃어버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세 꾸러미의 시신더미를 혹여 군인들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그것만 목숨 걸고 지키느라 다른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씨는 이 사고 후 5년 동안 '냄새 병'에 시달렸다. 우울증도 심각했고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흙이 핏덩어리와 뭉쳐져 있고, 사람의 살에도 고기와 똑같이 결이 있었으며, 유골은 사람들이 고기를 발라먹고 남은 모습과 똑같았다. 머리는 속이 빈 채로 가죽만 남아있는 형상이었다. 마치 17~18세기 북아메리카에서 유럽 이주민과 인디언이 벌인 전쟁에서 사상자의 머리가죽을 벗겨낸 것을 연상시키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사람이라면 도저히 볼 수 없는 참혹한 그 장면을 목격한 후 이씨는 한참동안 고기를 입에 대지 못했다.

끔찍한 광경을 본 이씨는 남은 인생을 악으로 살았다고 했다. 청와대와 국회, 법원을 찾아다니면서 이 엄청난 사고의 비밀을 밝혀달라고 애원했지만 들어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차가운 사회적 외면이 가슴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 제주도 한라산 관음사 매표소에서 3.7.km 떨어진 곳에 세워진 C-123 공군 수송기 사고 원점비 비문에는 당시 사고가 '대침투 작전' 중 벌어진 일이라고 쓰여 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25년째 연결되지 않은 등산로와 원점비... 조릿대만 무성

무엇보다 이씨는 군 당국이 약속한 것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데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5월, 100일 위령제 이후 유가족들이 사체유기 등을 문제 삼으면서 현장정리를 요구하자 군 당국은 안내문을 보내 제대로 처리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은 육군 7787부대가 유족들에게 보낸 안내문의 일부다.

현장 최종 정리

"유족들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 유족 전체를 대표하시는 1분과 저희 부대원 10명이 오는 6월 30일부터 7월 3일까지 제주도 현장에 내려가 최종정리 작업을 하고 추가 유해 발견 시 이를 현지에서 화장하여 이미 화장해 국립묘지에 봉안된 유해와 합동으로 충혼비에 안장해 안장식을 하는 한편 등산로와 원점비 사이의 통로를 개설함으로써 정리 작업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 약속도 결국은 거짓말이 됐다.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이재수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군 당국은 1년 넘게 사고현장에 비행기를 방치해놨다고 했다. C123 군 수송기 추락사고로 남편을 잃은 아내들은 1982년 여름 제주 사고현장에 가서 기막힌 표정으로 잔해더미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기념촬영까지 했다. 군 당국은 폭발물이 터지면 위험하다고 현장접근을 막았지만 아내들은 차라리 죽는 게 영광이라며 제 발로 폭발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군 당국이 등산로와 원점비 사이의 통로를 개설하겠다는 것도 여전히 거짓말인 채로 남아있다. <오마이뉴스> 취재진이 지난 3월초에 찾아간 한라산 관음사 코스의 원점비는 여전히 길이 아닌 길로 한참 들어가 헤매야 찾을 수 있다.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통로는 개설돼 있지 않다.

25년이 지난 지금, 이씨가 원하는 바는 단 한 가지, 진실규명이다. 대간첩침투작전이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 경호를 위한 '봉황새작전'으로 사건의 진실을 '원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비문도 당연히 교정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고현장에서 주검도 제대로 수습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진행된 1982년 2월 9일 '1차 장례식'이 가짜였다는 점도 국민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가짜 장례식에서 유족 사이사이에 군인들이 끼어 꼼짝할 수 없게 만들고 유골함조차 만지지 못하게 했던 점도 군대는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군대, 유족에게 사과해야...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도"

"1차 장례식이 열리던 1982년 2월 9일 오전 10시. 저는 영전 앞에 꽃 한 송이 못 올려놨습니다. 군인들이 양쪽에 딱 달라붙어서 우발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도 국립묘지 유골함이 빈 항아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시신을 묻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씨는 이제라도 전두환 정권 당시 벌어진 'C123 공군수송기 추락사고'의 비밀을 국가가 나서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정말 억울합니다. 전두환씨 한 명을 호위하기 위해 무려 53명의 장병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정부 차원의 사과나 손해배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끔찍한 독재의 희생양이었습니다. 군인들이 유족을 가두고 감금한 인권유린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합니다. 이제라도 국가가 나서서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이영숙씨는 남편의 죽음 이후 부대에서 인편으로 임관반지를 전달받았다. 남편의 동료들이 사고현장에서 찾아다준 반지는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숯검정이 돼버린 임관반지지만 여전히 블루 사파이어는 빛나고 있었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씨는 남편의 임관반지를 탄 채로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시커먼 숯검정이 됐지만 블루 사파이어 반지는 이씨와 남편을 잇는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 특전사 제주 2·5 유족회 회원들이 19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평화의 집'에 25년 만에 다시 모였다. 이들은 25년이 지난 사건이지만 진상규명이 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 2] 2007년 3월 19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특전사 제주 2·5 유족회' 회원들이 25년 만에 다시 모였다. 경북 영천, 강원도 강릉·철원, 경기도 수원, 충남 대천 등 전국에서 '봉황새작전'으로 아들을 잃은 부모들이 다시 한 번 진상규명을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서울로 옮긴 것이다.

19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평화의 집'에 모인 유족들은 "우리는 이 비행기사고의 진실규명을 원한다"면서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많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경북 영천에서 새벽에 서울로 출발했다는 황상술(고 황용운 상사의 아버지)씨는 "25년 전부터 정부는 유족회가 보상금 몇 푼 더 받기 위해 청원을 내는 것이라고 비꼬았다"면서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 사고의 정확한 진실규명과 전두환 대통령, 박희도 특전사령관 등 사고 책임자 처벌과 진정한 사과"라고 강조했다.

신숙자(고 김영주 상사의 어머니)씨는 "나 죽으면 이제 정말 몇 집 안 남는다"면서 "부모 살았을 때 정부가 마지막으로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주름진 얼굴을 활짝 폈다.

1982년 2월 5일 제주 비행기 사고 당시 2살이던 고 천성목 상사의 딸 천옥경씨도 "아버지가 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제는 알고 싶다"며 "2004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진실을 알 길이 없었는데 정부당국이 진실규명에 나서준다면 유자녀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한 마음이 들 것 같다"고 당부했다.

국방부는 <오마이뉴스>에서 지난 15일 보낸 공식문서를 포함, 몇 차례 이 사고와 관련된 자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공식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한편 '특전사 제주 2·5 유족회'는 26일 오후 2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이 사고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직권조사를 요청할 예정이다.

/장윤선·김도균 기자


덧붙이는 글
[발굴탐사] '제주 봉황새작전의 비밀을 찾아서' 기획기사는 총 4부로 마감합니다. 이영숙씨의 개인사정으로 실명을 밝히지 않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총 4부에 걸친 긴 기획기사를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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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새 작전(3)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1. 17:14


2007년 3월 16일 (금) 11:43   오마이뉴스

전두환, 하루만에 '조종사 착각' 규정 "인명은 재천, 모든 것 잊고 복귀하라"

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무려 53명의 군인들이 전원 몰살한 이 사고는 이미 역사속에 묻혀졌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유족은 대부분 고인이 됐거나 연로하지만, 여전히 25년 전 사고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부터 취재해 온, 일명 '봉황새 작전'으로 불리는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처리 과정 등을 모두 4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장윤선·김도균 기자]
▲ 고 김준식 소령의 아내 최광선씨가 2차 장례가 치러진 뒤 남편의 묘역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번 사건은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자신을 경호하기 위한 이른바 '봉황새 작전'을 수행하다 53명의 군인들이 몰사한 '82년 C123 공군 수송기 추락' 사고 보고를 받은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인 첫 반응이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사건을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라고 규정했다.

<오마이뉴스>가 단독 입수한 군 내부 자료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1982년 2월 7일 오후 2시 40분 제주 6해역사령부를 방문해 약 20여분간 구조작업관계 등을 보고받고 이같이 말했다. 사건발생 21시간 만의 일이다. 이 자료는 이번 <오마이뉴스>의 보도로 25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당시 군 수색대는 82년 2월 6일 오후 5시경에야 처음으로 사고현장을 발견했다. 이들이 상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탐라계곡은 1100m 고지로 기상불량(진눈깨비)과 20㎝의 눈이 쌓여 조사활동이 불가능"했으며 "다음날(7일) 현지로 다시 출동해 조사를 벌일 예정"이었다.

시간을 역산하면 군 수색대가 사고현장에서 본격적인 수습을 시작한 지 7시간 만에 전 전 대통령이 '조종사 착각'으로 사고 원인을 못 박은 꼴이다.

사망자는 53명인데 찾아낸 주검은 총 90구?... 군 당국의 엉터리 조사

C123은 어떤 비행기?

한국공군이 운용한 기종은 C-123K(Provider)로 1973년 도입됐다.

총 22대가 공군의 주력 수송기로 부대이동 및 전개, 장비·물자 수송, 공중화물 투하 등에 활용됐으나 1994년 CN-235 중형수송기 도입 이후 완전 퇴역했다.

C123은 1949년 10월 14일 최초 비행했으며, 엔진은 P&W사 R-2800-99W 성형 피스톤 엔진×2기, 출력은 2300hp×2, 길이는 23.3m 폭은 33.5m 속도는 454km/h 항속거리는 4828㎞이다.

무게는 1만5800㎏이며 수송능력은 총 60명, 화물은 6800㎏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군 수색대는 82년 2월 7일 오전 8시부터 사고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사고는 이틀 전인 5일 오후 3시 15분경 발생했다.

이 수습 작업은 오후 5시까지 총 9시간동안 계속 됐다. 수색대원 104명이 작업에 동원됐고, 이들은 한라산 개미등 계곡 일대를 조사했다. 9시간의 수색 끝에 사고현장에서 총 37구의 사체를 찾았으며 이 가운데 20구는 신원이 확인됐으나 17구는 식별이 불가능했다.

이어 군 수색대는 이튿날인 8일 사망자 53명 가운데 찾지 못한 시신 16구를 모두 찾아냈다고 보고했다. 연이어 같은 날 오전 11시 55분에는 사고기체를 현장에서 2차례 폭파했으며, 오후 1시 5분에 사체 14구, 오후 3시 30분에 23구의 사체를 더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 자료에 의하면 82년 2월 7일과 8일 양일 사이 군 당국은 53구의 주검을 전원 찾아낸 것이 된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일단 계산이 안 맞는다. 사망자는 53명인데, 찾아낸 주검은 총 90구다. 숫자가 조작됐거나 사체의 일부분을 한 구로 쳤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유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82년 5월 15일 '100일 위령제' 이후 한라산에서 찾아낸 '수습 안 된 주검'이 정부미 포대자루로 세 포대나 된다. 포대자루 속의 시신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지 분간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군 당국은 유가족들이 찾아낸 이 시신더미를 제주 화장터에서 화장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뿌리는 등 2차 장례식을 올린 바 있다. 따라서 군이 작성한 이 문서에 거론된 '사망자 53명 전원 구조'는 거짓말일 공산이 크다. 군 당국이 정말 '전원 구조'했다면 82년 5월 시신더미는 그 자리에 없었어야 옳다.

실제 군 당국은 당시 시신 구조에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군 당국은 "사고 장소 일대에 눈이 20㎝ 정도 쌓여있고 진눈깨비로 시계가 매우 불량하고 경사가 가파르고 험준해 작업병력이 로프에 의지한 채 사체를 이동하고 있다"며 "완파된 기체 밑에 사체가 깔려 있어 구조작업이 늦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유족 이재수(58·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씨의 증언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이씨는 지난 13일 보도된 <오마이뉴스>의 "발굴탐사① 전두환 경호 가다 몰사 당한 53명…" 기사 인터뷰를 통해 "날씨가 춥고 기상도 안 좋은 상태에서 군인들도 힘드니까 사체를 제대로 수습하지 않고 대충 정부미 포대자루에 담아 땅에 묻고 끝냈다"고 밝힌 바 있다.

▲ 제주 C123 공군 수송기 추락사고 이후 두번째로 진행된 장례식. 고 허창훈 상사의 아버지 허윤경씨가 유골함을 들고 장례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빨간 티셔츠의 여인은 고 천성목 상사의 아내 염영희씨. 염씨는 2004년 남편을 따라 세상을 등졌다.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전두환 "병사 사기진작 대책 강구, 모든 것 잊고 복귀하라"

당시 군 당국이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건에 대해 보고 받은 후 이번 사건은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라며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안타까워하시면서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고 말한 것으로 돼있다.

또한 전 전 대통령은 당시 박희도 특전사령관과 김두청 707대대장에게 "병사들의 사기진작 대책을 강구하고 대대장 책임 하에 15일간 6해역사의 협조로 제주도 취약지역 수색활동 등의 훈련을 실시한 후 모든 것을 잊고 복귀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전 전 대통령에게 "희생자 전원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1계급 추서해 달라"고 건의한 것으로 돼 있다. 실제 봉황새 작전으로 희생된 53명의 장병 모두에게 정부는 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사고로 숨진 장병들이 속해있던 육군 쪽 인사들은 이 사고 이후에도 승승장구 했다는 사실이다.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까지 진급했고, 정만길 특전사령부 참모장도 국방대학원장(중장)을 지냈다. 또 사고를 당한 부대원들의 직속 지휘관이었던 김두청 707대대장도 대령으로 진급했다.

유가족들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박희도·정만길·김두청 3인의 승진을 납득하기 어렵다. 무려 53명이나 되는 장병이 사망한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었어야 옳았는데도 오히려 더 승승장구했다"며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 특전사 2·5유족친목회가 88년 12월 17일 이재형 국회의장 앞으로 보낸 국회 청원서.
ⓒ2007 오마이뉴스 남소연
유족들 "진상규명 해달라" 청원... 눈감은 국회

82년 신군부의 위세 때문에 진실규명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던 유가족들은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국회와 청와대를 찾아다니며 청원서를 제출했다.

88년 10월 14일 김운환 민주당 의원은 국회 건설위원회 제주도 국정감사에서 "사고 당시 당국은 군 작전 중 사고라고 발표했으나 사실은 대통령의 경호목적이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김 의원은 "공군 수송기가 추락해 정예공수부대원들이 희생된 이 사건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나섰으나, 그 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는 못했다.

김 의원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장이 크지 않자 '특전사 2·5유족친목회(회장 고 이재훈)는 같은 해 12월 17일 당시 이재형 국회의장(민정당·7선 의원) 앞으로 청원서를 보냈다. 탄원 내용은 사체 유기와 진상규명 두 축으로 구성돼 있다. 청원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82년 2월 5일 전두환 대통령께서 제주도 년두 순시와 제주 국제공항 준공식 행사로 인해 특전사 요원 450명을 제주도에 투입하라는 명령과 이를 수송키 위해 군수송기를 이륙시키라는 명령이 청와대로부터 하명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눈도 많이 왔고 기후가 극히 악조건이었으므로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 통제국에서는 모든 비행기 이륙을 통제했고 제5전술공수비행단에서도 C123 군 수송기로는 도저히 이륙할 수 없다는 의견을 두 번씩이나 보고했다.

그럼에도 청와대로부터 강력한 지시에 의해,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이기에 2월 5일 오후 3시에 이륙시켰으며 (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이러한 악조건을 알면서도 특전사 요원에게 락하산도 휴대시키지 않고 탑승시켜 전두환씨에게 바쳐지는 제물로 죽게 만들었다."


유족들은 이 탄원서를 통해 ▲하늘의 뜻을 무시하고 군인은 죽어도 좋다는 '살인마 일당'을 철저히 규명해 처벌해 달라 ▲특수 목적으로 국가의 많은 재정을 투자해 양병한 군인을 대통령이라고 해서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시켜 이 같은 비리사건이 단절되도록 조처해달라 ▲악조건의 기후임에도 자기의 출세를 위해 권력 앞에 충성을 아부해 위험 사실을 알고도 죽음의 길로 보낸 특전사령관 이하 책임자를 엄중 처벌해 달라고 주장했다.

사체 유기와 관련해서도 "82년 5월 15일 충혼비 제막식에 참석한 유가족들은 원점비가 있는 사고현장에서 군복과 시계 등 많은 유물과 사체에 10여 마리의 까마귀와 쉬파리가 앉아 뜯고 있는 상황을 목격했다"며 "구두를 신은 다리와 팔, 뼈와 살을 모아 장례를 한번 더 치렀어야 했다"고 고발했다.

이어 "2차 장례 뒤 비행기 잔해와 시체를 즉각 치워달라고 부탁했지만 높은 지대에 있다는 이유로 재폭파시켜 그 밑에 깔려 있던 유해는 산산조각이 났다"며 "머리가 터지고 골이 튀어 나온 것을 유족들이 손으로 파내 항공편으로 가져온 뒤 서울 공항동의 허윤경 유가족 집에서 염을 한 적도 있다"고 밝혔다. 또 "이 시신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려 했으나 국방부의 반대로 다시 제주도로 인도해 충혼비 뒤에 안치하고 3차 장례식을 올렸다"고 설명했다.

실제 제주도 한라산 관음사 매표소 부근에 마련된 특전사 C123기 추락사고 관련 충혼비 뒤편에는 시멘트로 마감된 흔적이 있다.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재수씨는 "겉에는 유물이 들어있다고 써있지만 실제로는 유골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검찰에 살인혐의로 전두환 고소하기도

▲ 특전사 2·5유족친목회(회장 고 이재훈)가 89년 12월 서울지검에 제출한 고소장(왼쪽)과 비행기 사고 이후 유가족들이 시달린 피해현황 자료.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김운환 의원의 폭로와 유족들의 청원에도 정부당국이 진상규명을 위한 절차에 돌입하지 않자, 유족회는 89년 12월 6일 서울지검에 전두환 대통령, 이희근 공군 참모총장, 주영복 국방장관, 박희도 특전사령관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혐의와 직권남용, 허위공문서 작성, 허위작성공문서 행사 등을 죄목으로 고소했다.

고소장에서 이들은 "82년 2월 5일 새벽까지 눈이 내리고 2차 대전 때 사용하던 낡은 C123(최초 비행 1949년 10월 14일) 수송기가 이륙하기에는 너무나 악조건의 기후였다"며 "김포·김해·제주공항에서도 항공기가 이륙하지 못하는 상태여서 수원항공 통제국(제10전투비행단 운항관제대)에서도 통제가 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특히 "박희도 특전사령관이 당시 부하들의 봉급에서 하사 7000원, 중사 이상 1만5000원, 장교 3만원씩 공제해 유가족과 상의하지 않고 충혼비와 원점비를 제작해 비문에 자신의 이름을 도용, 기재했다"며 "이것은 유가족과 영령들을 우롱한 행위이자 군인을 정치적 도구로 악용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유족회는 이 고소장의 마지막 부분에 "88년 11월부터 89년 5월까지 5차례에 걸쳐 정부에 탄원했으나 아무도 일언반구 사과가 없었다"며 "법 앞에 호소하는 것은 온 국민 앞에 사실을 사실대로 파헤쳐서 민주주의 아래 인권과 생존권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독재정권 시절 빚어진 끔찍한 군 사고... 진상규명에 손놓은 정부

수사에 들어갔던 서울지검(담당검사 신광옥)은 수사에 3년이란 시간을 끈 끝에 92년 12월 26일자로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혐의 없음'을, 직권남용·허위공문서 작성·허위작성 공문서 행사 등의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오마이뉴스>는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신광옥 검사(현 법무법인 다울 대표변호사)에게서 당시 검찰의 수사종결 결정에 대해 설명을 듣고자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유족들이 바랐던 이 끔찍한 비행기 사고의 진실규명은 결국 이뤄지지 않은 채 유족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89년 소송 당시 이들이 제출한 유가족 피해현황에 따르면, 박봉우(고 박진수 준위의 아버지)씨는 사고 당시 졸도해 척추장애로 7년간 병상에서 누워 있었다. 이밖에 다른 유족들도 고혈압이나 신경마비, 백혈병, 악성갑상선, 신경성위장병, 정신장애로 인한 빈혈증세, 좌골신경통, 정신이상, 신경통으로 인한 호흡장애와 속병, 신경쇠약, 뇌진탕 등을 호소했다.

사고가 발생한지 25년이 흐른 지금, 이미 많은 유가족들이 세상을 떠났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오는 발길도 뜸해졌다. 10년 전 만해도 어머니, 아버지들이 제주 사고현장을 찾아다녔지만 지금은 원점비가 휑해질 만큼 인적이 드물다. 조릿대 등 잡풀을 정리하지 않아 원점비를 찾아가기조차 힘들다.

김영용 소령의 아내 김귀선(57)씨는 "잊혀진 사건이 다시 살아나 끔찍하지만 이제라도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보고 싶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장윤선·김도균 기자


덧붙이는 글
[발굴탐사] 제주 봉황새작전의 비밀을 찾아서 기획보도는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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