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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검은베레'의 집단순직은 극비였다 - 2편 2007-03-15 13:37:10, 조회 : 194, 추천 : 0

2007년 3월 14일 (수) 10:13   오마이뉴스

"장세동이 전두환에게 과잉충성..." '조사중'인 채로 25년 간 오리무중

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무려 53명의 군인들이 전원 몰살한 이 사고는 이미 역사속에 묻혀졌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유족은 대부분 고인이 됐거나 연로하지만, 여전히 25년 전 사고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부터 취재해 온, 일명 '봉황새 작전'으로 불리는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처리 과정 등을 모두 4차례로 걸쳐 보도한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장윤선·김도균 기자] [기사수정 : 14일 오전 10시 48분]

"지난 6일 오후 3시경 제주도 지역에서 대침투작전 훈련 중 병력이 탑승한 C123 군용기 한 대가 악천후로 인해 추락했다. 이 수송기에는 육군 제7787부대 장병 47명과 공군 제5672부대 6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당일 오후 4시경 기체잔해가 발견됨으로써 이들은 순직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고 원인은 이 수송기가 착륙하기 위해 제주도 해안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이상기류에 휘말려 한라산 정상 북방 3.7㎞ 지점에 추락했으며 자세한 사고원인은 조사 중이다. 한편 주영복 국방장관은 이번 C123기 추락 사고에 대해 사후처리 문제에 유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1982년 2월 8일자 <동아일보>)

1982년 2월 6일 저녁 국방부 대변인이 발표한 'C123기 추락사고'에 대한 공식 입장을 보도한 기사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군용기의 자세한 사고원인은 조사 중"이며 "53명의 사망자 명단은 군 사정에 의해 발표하지 않고 유가족에게만 통보하기로 했다"고 썼다.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한 이른바 '봉황새 작전'을 수행하다 군용기가 추락해 53명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전두환 정권은 "조사 중"이라는 말로 무마하려고 한 것일까. 사망자 명단을 공개하지 못할 "군의 사정"이란 대체 무엇일까. 정부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 경호를 위해 출동했던 특전대원들의 죽음을 왜 '대침투작전 훈련 중 사망'이라고 바꿔치기한 것인가.

하지만 그나마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는 1982년 2월 8일자 석간 <동아일보>의 단신이 끝이었다. 이 사건은 "조사 중"인 채로 25년간 오리무중이 됐다. 세간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제주 봉황새작전 유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의 연속이었다.

▲ 19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기에 탑승했던 특전사 대원들. 이들은 그날 오후 3시 15분경 전원 사망했다.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증언 ①] 이광형 "살데미 한 열 근? 뼈가 송곳처럼 뾰족"

충남 보령시 주교면 신대리에 사는 여든 세 살의 이광형씨. 이씨는 82년 2월 5일 C123 공군 수송기 추락사로 아들을 잃었다. 3년 전엔 부인과도 사별했다.

이른 아침 눈이 떠지면 종일 담배와 화투를 벗 삼아 다시 밤이 되길 기다린다는 이씨는 오랜만에 말벗이 돼줄 기자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지난 5일 만난 이씨는 다락방에 올라가 손수 수확한 꿀 한 종지를 내놓으면서 대접할 게 이뿐이라며 쑥쓰럽게 웃었다.

이제 너무 늙어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졌다는 이씨는 푸른 빛깔의 실크스카프로 꽁꽁 싸서 장롱 깊은 곳에 잘 보관해두었던 25년 전 사고 자료를 꺼냈다.

"그게 82년 2월 6일이었을규, 아마. 시골집으로 군인 하나가 왔어. 통지가 온 게지. 비행기가 실종됐다구만 하구 긴말 안 했시유.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특전사령부가 있었는디, 거길 가시자구 해서 갔지유. 시상에 거여동서 군인들이 서서 화장실 가는 것두 다 통제했시유. 어디 가느냐 이게지. 내 아들이 죽었다는디 시신 줌 보여달라고 통사정을 해두 군인들이 말을 듣남? 점잖은 평민 체면에 댓거리하고 싸울 수두 없구, 걍 그이네들이 하잔대루 했지유."

"동작동 국립묘지는 눈물바다 됐지만, 신문엔 단 한 줄도 안 나와"

이씨는 당시 둘째아들 고 이재훈 준위를 시신 한 번 보지 못하고 보냈다. 군 당국을 믿었기 때문이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사고현장엔 접근조차 불가능하다는 말에 발길을 재촉할 수도 없었다. 군 당국이 워낙 촘촘하게 감시하는 터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우리가 워티게 제줄 가유. 군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유. 사방팔방에 감시하게 맹글어놓구 못가게 했능걸 뭘. 우리버텀 워티게 할 줄 몰르니께 우린 뭐 기냥 끝날 때까정만 기달렸시유."

82년 2월 9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는 육군 합동으로 영결식이 거행됐다. 엉겁결에 아들을 잃은 부모는 오열했고, 핏덩이 자식을 둔 고인의 부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목놓아 울었다. 참혹한 비행기사고로 동작동 국립묘지는 눈물바다가 됐지만 신문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날이 82년 5월 15일이유. 특전사에서 100일제를 지내준다구 다 제주도로 불러모더만. 억울하니까 충혼비라두 세워준다구, 제막식한다구 비양기표 죄다 끊어줬지. 100일제 지내구, 충혼비 제막식두 하구, 점심 먹구, 빨리 공항에 나가야 비행기 안 늦지 하든 참에 난 딸년이 여기 사니까 두루 둘러보구 사고현장에두 가보구 그러커구 올라갈래니까 먼첨들 가셔, 했드만 몇 사람이 그럼 나두 사고현장 보구 간다구 그러니께 군인덜이 안 된다 그거야. 이번 비행기 못 타면 전부 못 가신다, 그러니께 그럼 가야지 하구 다들 갔슈. 대구 아줌니 한분만 남구 다 갔쥬. 군인이 사고현장엔 못 가시니께 그리 알라구 해서 알았다구 하구 담날 딸년하구 사위하구 앞세우구 현장에 갔슈. 거기버텀 사단이여."

 
▲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추락한 C123기 잔해. 사건 당시 군인들이 비행기 너머를 수색하고 있다.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씨가 손을 바르르 떨면서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오래 전 사고 기억을 다시 떠올리려니 회한이 밀려드는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사고 난 한라산 개미등 계곡 원점에 가보니께 나무가 싹 다 잘렸습디다. 가시철망을 요렇게 쳐놨는디 '위험 폭발물 주의' 요렇게 써놓고 못 들어가게 해놨드라구. 100일이 지났는디도 비양기가 참 그대로 있다 이거여. 딸년이 거길 들어가서 제 동생 물건이 있나 찾아보겠다구 해서 뜯어말기구 나믄 대구 아줌니가 또 들어간다구 난리쳐서 말기구, 참 그랬슈. 자기 식구 옷가지 아닌감 찾아보구, 내 새끼 양말조각인감 뒤져보구, 뺑뺑 가시철망 돌아가매 눈물만 흘리구 섰었지.

가시철망 칠 새 있셨심 현장정리나 즘 하지. 여적지 기냥 뒀냐구 난리를 칠 건디 사위랑 딸년이 막아서 말었는디, 애덜이 앞서가면서 뭘 자꾸 비비적거려서 '얘 뭐니?' 하믄 '아부지 암것두 아녀요' 해서 말었는디 냉중에 알고 보니께 흩어진 살점데미, 뼈조각을 발로 묻으면서 지나갔대지 뭐여유. 혹시라도 지 애비 보구 놀랄까 무서 그랜 게지."

정권의 거짓말... 제대로 수습조차 안된 사고 현장

'사후처리 문제에 유감이 없게 하겠다'던 주영복 국방장관의 대국민 약속은 거짓말이었다. 군을 믿었던 이씨는 실로 믿기지 않는 제주 사고현장을 유족들에게 전화로 알렸다. 유가족들이 직접 사고현장을 수습하는 걸 목격하고 완벽하게 정리를 끝냈어야 했는데 무작정 군 당국을 믿은 게 실수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스스로 발등을 찍게 됐다는 게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씨는 당시 사고현장에서 시계와 수첩 같은 유품들을 주워왔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인들의 부인 19명이 1982년 5월 19일 제주 사고현장에 가겠다고 나섰다.

"남편 죽은 데서 나두 죽으먼 월매나 행복스러우냐 이거여. 죽거나말거나 우린 상관할 바 아니니께 가겄다구 말이지. 그이네들이 갔다와서는 남자들이 즘 가야겄다구, 같이 즘 가시자구 기별이 또 왔슈. 영령들이 까마귀 밥, 늑대 밥 노릇 허게 생겼으니 빨랑 즘 가시자구 말이쥬."

1982년 5월 25일 남자 유가족 10여명과 고인들의 부인들이 다시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갔다. 이날은 출발부터 군인들이 따라붙었다. 수류탄을 보여주면서 사고현장에 들어가면 폭발 사고가 나서 다 죽게 된다고 위협도 했다. 부인들은 가시철망을 제치고 들어가 남편의 유품을 찾겠다고 난리였고, 남자 유족들은 이들을 말리느라고 아수라장이 됐다. 군인들과 남자 유족들 간에 멱살잡이가 진행될 즈음 한쪽에서 유가족 중 하나가 '이리 와보라'고 외마디 소리를 외쳤다.

"일순간 주목했쥬. 나 그 사람, 이름이 이렇게 생각이 안 나. 쫓아가봤드니 벌써 땅을 한 50㎝는 팠나봐. 어린애 죽으면 갖다 묻고 짐승들이 못 먹게 하느라구 동막대기(돌멩이) 올려놓듯이 그렇게 줏어다 해놨드라구. 술 한 잔 부은 흔적두 있구, 촛농 떨어진 흔적두 있구.

거길 파니께 푸대가 하나 나와. 고기로 치자면 한 열 근? 살데미, 군화 신은 발, 뼈가 송곳처럼 쫙 잘려서 뾰족해 있드만. 갑자기 한 사람이 군화를 끌러보자구 하드라구. 내가 잡았지. 이거 끌러서 내 새끼라고 밝혀지면 나 여기서 졸도한다, 당신 남편 거라면 워쩌것냐. 그러지 말구 우리 이거 들구 전두환이한테 갖구 가든지, 군부대에 갖구 가든지 결정을 짓자.

그러구 있는디 군인들이 와서 저희들한티 넘기라는겨. 계속 무전기로 뭐라 해싸코. 응, 유족들이 난동부리구 있다, 아 이 지랄하는겨. 따라왔든 군인 한 눔이 허공에 대고 총 쏘믄서 '명령이다, 손 떼라' 그래서 우리가 군인이야 이눔아 그리구 냅다 쥐고 산을 내려왔지. 내 목심이 끊어지든지, 당신네 목심이 끊어지든지 워디 한번 해보자구 그럼서 계속 실갱이를 한겨."

이씨는 개미등 계곡에서 관음사 매표소로, 다시 산천단 아래로 내려와 택시를 탔다. 우선 서울 가는 공항으로 가자고 했다. 제주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항공기를 타려고 하는데 항공사 직원이 '푸대자루'에 담긴 게 뭐냐고 물었다. 이씨는 거짓말하기 싫어 솔직히 말했다. 5일 사고 난 비행기에 탔던 유해들이라고.

항공사측은 기내에 유해를 실을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군인의 사체는 부대 사령관의 반출 허가증이 있어야 하고, 일반인이라면 도지사의 반출 허가증이 있어야 기체에 실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적도 똑같았다. 제주도에서 포대자루에 담긴 시신을 들고 뭍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모두 봉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공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인적이 뜸한 여관으로 갔지유. 이 보따리를 들고 워딜 다닐 형편도 못 됐구, 우선 유골함이라두 하나 짜서 그 안에 넣고 다녀야지, 푸대자루에 끌고 다니니께 영 볼썽사납더라구.

여관 근처 목공소에 가서 유골함을 짜는디 윤 대령이라는 사람이 만나자구 한다 이거여. 다방에 와 앉았다구. 가서 만났지. 시체를 인계하라는 겨. 전두환한테 가져가든지, 국립묘지에 갖고 가든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께 군은 빠지라구 했드니, 군인은 국가의 시신이라는 겨. 개인의 시신이 아니다 이게지. 군정이나 진배없는 행정당국이니께 쉽게들 말한 게지.

그런데 방법이 없겠드라구. 그래서 꾀를 냈지. 제주도에서 화장해서 갖구 가겄다구 말이여. 어차피 당신네들이 독선 출항증도 안 끊어줄게 뻔하니께 앳새 제주화장터에서 화장을 해서 갖구 가자구 말이여. 그래서 그걸 갖구 서울 와서 국립묘지 27(사병)·29(장교) 묘역에 고루 뿌렸지유."

▲ 1982년 2월 9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C123기 사고로 숨진 특전대원들의 안장식이 열렸다.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위로금만 전달... 사과 한마디 없던 전두환

이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군 당국에 다시 위령제를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1982년 5월, C123 공군 수송기에 탑승했던 군인들을 위한 위령제를 다시 지냈다. 이씨는 1982년 7~8월, 그해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까지 7차례 정도 제주도에 시신을 수습하러 다녔다.

개미등 계곡에 앉아 파리가 덤벼드는 곳을 파보면 영락없이 썩어 가는 주검이 있었다. 낙엽이 질 무렵에는 살 더미가 떨어지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유골을 심심찮게 발견했다. 해골이나 엉덩이 모양의 뼈 등을 수십 점 넘게 화장한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군인덜이 이제 다 정리했다구 해서 가보니께 비양기를 폭파해서 흙으로 싹 덮어놨드만. 그담부텀 1년에 한 번씩 제사 때 갔구, 점점 익히는 게지 뭐. 죽은 놈 자꾸 생각해봐야 뭘 혀.

날씨가 원체 안 좋아서 공군이 비양기 못 뜬다구 청와대에 보고했는디, 장세동이가 당시 경호실장 아녀. 전두환이한티 충성허느라 기냥 띄우라고 그랬다드만. 그러니께 그 비양기가 1982년 2월 5일 아침에 뜰 거였는디 날이 원체 안 좋아서 오후 1시 30분엔가 떴다지. 것두 다 장세동이가 호통해서 그랬다는겨.

우리 유족들은 그래유. 전두환이를 보호하러 가다가 애들이 참 그렇기 무선 사고를 당한 거 아닌감. 그럼 1년에 한 번은 국화꽃 한 송이 들고 찾아와야지. 일절 없어. 저를 보호하러 가다가 죽은 사람들 아닌감. 충혼비 앞에 묵념 한번 하구, 방명록 적구, 꽃 한 송이 놔주면 좀 좋아?"

이씨는 당시 사고로 법정 보상금(사망 보상금, 대간첩작전 원호보상금, 군사원호상법에 의한 유족연금, 군인연금법에 의한 유족연금)과 급여,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서 500만원, 주영복 국방장관에게서 200만원, 각 군이 1000원씩 걷은 조위금 등 약 2500만원 정도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꽤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과를 받지 못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단 한 번도 사과의 뜻을 전달한 바 없다.

"공수부대 위험하니께 빨리 제대하라구 그럼, 이눔이 시익 웃으문서 만약 불의의 사고가 생기면 아부지 평생 동안 편안히 살 수 있게 해드릴 수 있어유, 이랬다구."

매달 보름께 연금 타러 우체국 앞에 서면 그 말부터 떠올라 눈앞이 흐려진다는 이씨는 주름진 손으로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쳤다.

▲ 1982년 2월 9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C123기 사고 희생자들에 대한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군인들이 유해를 땅에 묻는 모습.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증언 ②] 김홍 "너무 가난하지만 않았어도 아들 죽지 않았을 텐데..."

제주 봉황새 작전으로 희생된 고 김인현 중사의 아버지 김홍(68)씨. 김씨는 당시 숨진 장병들의 부모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사건 25주기였던 지난 달 5일 취재진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았다가 김씨와 마주칠 수 있었다.

한 달 뒤인 지난 6일 서해바다와 인접한 경기도 시흥 월곶의 자택에서 김씨와 다시 만났다. 김씨는 사진 등 25년 전 비행기 사고를 기억할 수 있는 유품들을 내놓고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인 김씨는 1982년 2월 6일,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밥을 먹고 TV 브라운관 앞에 앉았다. <9시뉴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TV를 켜자마자 자막에 실린 '7787부대'가 커다랗게 보였다. 아들이 속한 부대에 사고가 났으니 걱정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했다.

이튿날(7일) 아침 일찍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있는 특전사령부 7787부대로 찾아갔다. 비행기가 실종됐다는 보도만 접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고소식을 들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우리 부부보다 먼저 부대로 찾아온 가족들이 있었지만 부대 안으로는 못 들어가게 했어요. 면회실에서 이름을 대면, 괜찮은 아이들은 괜찮다고 말해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하고 잠깐 기다리라고 말했어요. 참 추웠는데, 연탄난로를 피워주고 손이나 녹이고 앉아 있으라고 했죠.

순식간에 20~30명의 유족들이 모여들었는데 남은 가족들의 아이들은 모두 사망한 거라는 입소문이 돌았어요. 군대가 공식적으로 말해주지 않았지만 알게 된 거죠. 일순간 면회실이 아수라장이 됐어요. 죽은 사람 시신 보여 달라면서 의자 부수고, 책상 엎어버리고 난리였죠."

김씨는 당시 숨진 장병 53명의 유족 가운데 가장 젊은 나이였다. 장남을 잃은 터였지만 남은 세 아들과 아내를 위해 당장 돈을 벌지 않으면 생계가 곤란한 처지였다. 남들은 제주도를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김씨는 함께하지 못했다.

"시신도 못 보고 2월 9일 장사를 치렀어요. 순직통지서는 2월 10일자로 배달됐죠. 군인이 직접 집으로 가져왔어요. 이 비행기에 탄 사람들이 제주도 가기 전에 한 달 동안 스키훈련을 갔다 왔어요. 훈련이 참 잘된 아이들인데, 사고를 직감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탈출했을 텐데, 모두 여러 훈련 때문에 고단해서 졸다가 사고를 당한 게 아닌가 싶어요."

김씨도 군 당국이 치러주는 100일제에 참가한 뒤 유품을 찾기 위해 제주에 한 번 더 내려간 일이 있다.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전자시계를 주웠는데, 시계들은 일제히 '3:15'에 멈춰있었다. 그래서 김씨는 이 비행기 사고가 2월 5일 오후 3시 15분에 일어났다고 믿게 됐다.

그렇지만 사고원인에 대해서는 일체 들은 바 없다. 그저 기상악화로 인한 사고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고 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알려고 백방으로 뛰어 봐도 알 길은 없었다.

"너무 가난하지만 않았어도 공수부대 가는 게 아니었는데…. 공수부대에 입대하면 월급 받으면서 군대 있을 수 있다고 그래서 간 거예요. 22살, 입대한지 1년 만에 죽은 거지요."

김씨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난하지만 않았어도 아들을 죽음의 현장으로 내몰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이 몰려온 듯했다. 옆에 앉아 있던 부인 이영자(65)씨도 몇 마디 거들다 울음을 터뜨렸다.

 
▲ 1982년 2월 9일 영결식 후, 고 김인현 중사의 어머니 이영자씨가 묘비를 쓰다듬고 있다.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엄마, 나 좀 빼줘. 나 너무 힘들어.' 특전사 공수부대 훈련이 너무 힘들다고 그랬어요. 우리 집은 '빽' 없냐고, 얘가 너무 힘들어서 휴가 나왔다가 조금 늦게 들어갔더니 탈영이라고 엄청 두들겨 팬 모양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빼줄 힘이 있어야죠. 딴 애들 다 잘 하고 있는데, 너만 왜 그러냐고 오히려 핀잔을 줬던 게 정말 가슴이 아파요. 공수부대는 들어가면 월급 준다고 하니까 덥석 들어간 모양인데 그렇게 심하게 훈련시키는 줄 우린 몰랐죠. 눈병이 나서 눈에 벌겋게 됐었는데…. 다 부모 잘못 만나 그렇게 된 거지요."

고 김인현 중사가 살아있다면 올해 마흔일곱이 된다. 김씨의 아파트 거실 벽에는 장성한 동생들과 조카들, 제수들이 촬영한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김씨는 장남인 고 김 중사가 빠져 있는 게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청와대 앞에서 우리 데모 참 많이 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사고 원인이 변변하게 밝혀지지 않았잖아요. 기상악화, 이 한 마디 말고 군 당국이 설명한 게 없습니다. 원호금 타가라는 안내문에도 대간첩침투작전이라고 돼 있는데, 우리 아들은 간첩 잡으러 간 게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 경호하러 간 것이거든요. 천하가 다 아는 일을 왜 군대만 쉬쉬하는지 모르겠네요."

[증언 ③] 이재영 "전두환에 과잉충성하다 빚어진 사고... 바라는 건 사과"

"장세동이 전두환한테 과잉충성하다 빚어진 사고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난달 20일 수원역 부근의 한 지하다방. 기자를 만난 고 이민호 상사의 아버지 이재영(80) '특전사 2·5 유족친목회' 총무는 앉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모두 잊혀 가는 판에,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다시 꺼내는 것 자체가 이씨에게는 고통인 것처럼 보였다.

이 총무는 "1982년 2월 5일 당시 기상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공군 당국에서 수송기를 띄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두 차례나 권고했는데도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장세동씨가 이를 강행했다"며 "결국 우리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전두환 정권"이라고 호되게 비판했다.

이어 "전두환은 염치가 없다"며 "무관심해서 그렇겠지만 자신을 보위하다 스러져간 53명의 영령들을 위해 방명록에 서명 한 번 한 일이 없다"고 씁쓸해했다. 25년 동안 유가족 차원에서 무수한 행사를 했는데도, 전 전 대통령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도 얼굴을 내민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섭섭해 했다.

이 총무가 기억하는 25년 전 비행기 사고에 대한 기억은 이광형씨나 김홍씨와 비슷하다. 한 군인한테 '비행기가 실종됐다'는 사고소식을 듣고 특전사에 갔다가 군인들한테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했다는 것. 당시 공직에 있던 터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다만 다른 유족들한테 사체 수습이 제대로 되지 않아 7차례 넘게 시신수습을 하러 다녔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

네 형제 가운데 장남이던 고 이민호 상사는 수원공고를 졸업하고 막노동을 하다 공수부대에 입대했다. 당시 이 상사의 혼담이 오갔는데, 상대편에서 사진을 보고는 '검은 베레를 쓴(공수부대) 군인과는 혼인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25년이 지난 지금, 이 총무가 바라는 것은 두 가지다. 정부 차원의 진정한 진상조사와 반성. 이 총무는 "이 사건이 오래 전 일이기 때문에 정부는 이미 잊었겠지만 유족들에게는 아직도 살아있는 사건이나 마찬가지"라며 "이제라도 당시 위정자이던 전두환씨의 사과와 반성을 듣고 싶다"고 당부했다.

▲ 1982년 2월 5일 발생한 공군 수송기 C123기 사고기에 탑승했던 장병들은 1달 동안 스키훈련을 다녀왔다. 스키훈련 후 기념촬영한 사진.
ⓒ2007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장윤선·김도균 기자


 
  
  봉황새작전(1)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1. 16:57
25년 전, '검은베레'의 집단순직은 극비였다 2007-03-13 15:39:10, 조회 : 351, 추천 : 1

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무려 53명의 군인들이 전원 몰살한 이 사고는 이미 역사속에 묻혀졌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유족은 대부분 고인이 됐거나 연로하지만, 여전히 25년전 사고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부터 일명 '봉황새작전'으로 불리는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처리과정 등을 발굴, 탐사해왔다. 총 4차례로 나눠 이 사고에 얽힌 잘못된 역사를 낱낱이 파헤친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장윤선 기자]

▲ 1982년 2월 5일 특전사 대원 등 53명을 태운 C123기가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 바위에 머리를 박고 추락했다. 사진은 25년만에 다시 가본 사고현장이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이재수씨. 지난 1일 <오마이뉴스>와 함께 사고현장을 찾아나선 그는 25년 전 사고기의 잔해가 1분도 채 안 돼 땅속에서 나오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그만 파요. 이제 와서 뼛조각이 나온들 뭘 어쩌겠어요. 유족 두 번 죽이는 꼴 아니에요?"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재수(57)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감았다. 지난 1일 한라산 해발 1100m고지에서 류머티스관절염도 잊은 채 정신없이 25년 전 비행기 잔해와 유골을 찾던 그녀가 철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섞어 토해낸 말이다. 잊고 싶은 맘 반, 찾고 싶은 맘 반인 듯 싶었다.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고, 재수씨는 눈 안 가득 눈물을 머금고 먼 하늘과 맞닿은 제주바다를 응시했다. 반평생 가슴 속 응어리가 돼버린 한을 바닷물에 씻어내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날아든 한 마리의 까마귀가 적송 가지에 앉아 까악까악 울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누이에게 이 준위가 인사하는 듯 말이다.

이재훈 준위는 특전사령부 707대대 소속으로 82년 2월 5일 오후 1시 30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출발한 공군 수송기 C123기에 탑승했다. 제주 연두순시와 제주국제공항 준공식에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특전대원들을 미리 태워 출발시킨 항공기였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제주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한라산 중턱 개미등 계곡에 머리를 박고 추락했다. 이 사고로 53명의 군인(특전대원 47명, 공군 6명)들이 전원 사망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전쟁을 제외하고 평시 작전 중 군인들이 한꺼번에 몰살한 이 사건은 매우 큰 사건이었음에도 '단신' 거리로 취급됐다. 유족들은 지금도 이 사건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은 이 사건을 '제주 봉황새작전'으로 기억하고 있다.

"저것 봐요, 저것 봐. 이런 게 다 예사로 안 보인다니까."

재수씨가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분홍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밑에 흙이 껴 시커멓게 될 정도로 땅을 팠다. 판초우의, 랜딩기어 일부 조각, 안전벨트, 알루미늄 기체, 쇠사슬, 탄피, 천 조각…. 재수씨가 땅 밖으로 끌어올린 것은 25년 전 사고로 불에 탄 C123기 잔해들이었다.

한 뼘 길이의 나무막대기로 5㎝ 정도 팠을까, 흙에 섞여 부식된 사고기의 고철 덩어리를 찾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종이뭉치가 딱딱하게 굳은 것 같은 회백색의 항공기 잔해들은 마치 줄기에 달린 고구마가 무더기로 땅 속에서 끌려나오듯 그렇게 우르르 몰려 나왔다.

재수씨는 "개미등 계곡 사고현장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유골도 나올 것"이라며 "군 당국이 당시 사고를 얼마나 허술하게 수습했는지 아느냐"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 줌 재로 변한 남동생 죽음의 진실을 이제는 밝히고 싶다는 재수씨는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사고기가 머리를 박은 커다란 바위에 세워진 원점비. 재수씨는 원점비 앞에 종이컵을 놓고 소주를 콸콸콸 쏟아붓고, 평소 남동생이 사랑하던 담배를 스무 개비 올려 일일이 불을 붙였다. 담뱃불이 긴 꼬리표를 달고 하늘로 연기를 피워올리는 동안 재수씨는 낮은 톤의 목소리로 25년 전 사고현장 속으로 기자들을 안내했다.

▲ 제주 한라산 관음사 입구 등산로 4.1km에 위치한 원점비. 이 원점비에서 사고현장까지는 조릿대를 헤치고 약 150m 더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양송남 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은 82년 2월 6일 군 수색대와 함께 사고현장을 수색했다. 양씨는 "당시 사고현장에서 갈기갈기 찢어지고 불에 탄 시신들을 목격했다"고 술회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1] 양송남씨 "갈기갈기 찢어진 시신,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말라더라"

82년 2월 2일부터 제주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당시 신문들은 모두 "제주에 북서풍 바람이 불고 가끔 흐리고 한때 눈이나 비가 내리겠다"는 기상예보를 연달아 보도했다. 지난달 28일 제주 한라산 영실매표소에서 만난 양송남(57·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씨도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참 많이 왔습니다. 날씨도 많이 흐렸고. 한라산엔 1m 높이의 눈이 쌓일 정도로 눈이 계속 왔어요. 사고 전날(4일) 밤 12시경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다음날(5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진들이 한라산 등반을 해야 하는데 안내자가 필요하니 좀 협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날도 이렇게 궂은데 무슨 한라산 등반인가 생각했지만 당시 청와대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어요. 힘이 셌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도저히 등산할 기상이 아니었어요."

양씨는 솔직히 불만이었다. 전문산악인이 아니면 등반하기 어려운 날씨에 권력을 내세워 등산로를 안내하라는 것은 '명령'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날씨 좋을 때 오시라고 권유할 형편도 못 됐다.

당시 등산로에는 입구에만 20㎝ 이상의 눈이 쌓일 정도로 상당한 눈이 내렸다. 일반인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당시에는 변변한 등산화도 든든한 오리털점퍼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안개가 짙게 깔리고 시야거리가 50m도 안 될 정도로 시계가 무척 안 좋아도, 등반은 해야 할 처지였다.

"6일 새벽 3시경 집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어요. 다짜고짜 용담1동 동사무소 앞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어디에 간다는 말도 없이 무조건 경찰트럭에 타라고 해서 탔죠. 차에 타보니 동료 2명이 동행했어요. 모두 4·3제주항쟁을 겪은 탓에 아무도 말하지 않고 20~30분 정도 달렸는데, 도착한 곳은 아라초등학교였습니다. 군인들이 교실에 커다란 군 작전지도를 걸어놓고 한라산 전체를 구역별로 나눠놓고 누가 어느 길로 갈지 정했습니다."

"흰 눈 위에 조각난 주검들이"

양송남씨는 50여명의 특전사 대원들과 함께 본부 수색대 안내를 맡았다. 나머지 두 명은 어리목 길과 성판악 코스를 안내했다. 하늘에서는 계속 공군 비행기가 웽웽 거렸고, 바다에는 해군 함정이 왔다 갔다 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몰려왔다.

"도대체 왜 별안간 군인들이 한라산에 떼를 지어 올라가야하는지 몰랐어요. 그냥 안내하라니까 안내했지, 군인들에게 감히 뭘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민간인은 나 포함 우리 직원 2명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군인이었으니까요. 그날도 날씨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책임 인솔자는 최락도 소령, 그 사람이었어요."

관음사 입구를 출발해 산천단 검문소로 향했다. 도로는 빙판이었고 군인들이 탄 버스가 도랑에 빠졌다. 버스를 빼내지 못해 그 때부터 무조건 걷기 시작했다. 그 길에 공주사대 산악훈련팀을 만났는데 최 소령이 "어제 오후 3시경 산속에서 굉음을 듣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양씨는 그때서야 '사고로구나' 직감했다.

새벽 4시부터 걷기 시작해 낮 12시가 돼서야 탐라계곡 흙붉은오름 중간지대에 도착했다. 해발 1200m 고지였다. 점심식사로는 군인들이 짊어지고 올라온 쌀을 항고(코펠)에 넣고 눈을 퍼담아 지은 밥이 준비됐다.

그러던 오후 1시경 최 소령에게 무전이 왔다. 사고가 난 기체를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양씨와 최 소령, 군인들은 서둘러 방향을 돌려 오후 5시가 돼서야 개미등 계곡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울창한 숲의 나무들을 싹둑 잘랐더군요. 등산로에서 100m 정도 걸어들어가면 움푹 패인 골짜기가 나오는데, 거기 암반을 들이받은 사고현장은 무척 참혹했습니다. 시신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죠. 최 소령이 군인들을 집합시켜놓고 업무를 나눴습니다. 시신 수습팀, 폭발물 꺼내는 팀 등으로 나눠 일에 착수하라고 했는데 군인들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머뭇머뭇 주저하니까 다시 재집합시키고 호통을 쳤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고 기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주변에는 항공기 안에 실었던 물건과 조각난 사체들이 흰 눈 위에 널려 있었다.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검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그 때 최 소령이 양씨에게 다가왔다.

"민간인으로서는 처음 목격한 것이니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지금 이날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쉬쉬하면서 살아왔지요."

양씨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사고에 대해 떳떳하게 털어놓는다면서 말을 보탤 것도 없고 덜 것도 없이 당시 겪고 본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 82년 2월 5일 C123기 사고 뒤 특전사에서 세운 충혼비.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충혼비 앞에서 마주친 새색시와 타올세트

산에서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뒤 내려와 밤 9시 저녁뉴스를 보는데, TV엔 아주 짤막한 자막으로 '공군기 추락사고'라고만 언급돼 있어 의아했다. 정확한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일체 보도가 없었다. 다만, '작전 중 순직'이라는 짧은 멘트만 있었다고 기억했다. 양씨는 사고현장의 심각성에 비해 보도는 터무니없이 약소했다고 지적했다.

"그 당시 최 소령 얘기로는 특전사 군인 1명당 1억원 이상 돈이 들어갈 정도로 훈련이 잘 된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태평양 한 가운데 떨어뜨려놔도 살아나올 사람들이라고 말이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무참하게 사고를 당한 것은 당시 엄청난 눈보라에 안개가 잔뜩 끼는 등 기상이 안 좋은데 무리하게 비행기를 띄워 그런 게 아닌가 추측을 해봅니다. 시계가 안 좋으니까 조종사가 한라산을 공항으로 착각한 것 아닌가 이거죠."

양송남씨는 25년 전 '봉황새작전'으로 희생된 특전대원들을 생각하면서 가끔 충혼비를 찾는다.

재작년(2005년)에는 충혼비 앞에서 한 신혼부부와 마주쳤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새색시는 이 비행기 사고의 내력을 알아보고 싶다며 양씨에게 다가왔었다. 알고보니 이 C123기에 탑승했던 한 특전대원의 딸이다. 생후 6개월에 아버지를 잃은 딸은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이 많았던 게다. 양씨는 군 당국이 그를 위해서도 정확한 사고원인을 말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양씨는 25년 전 본부 수색대원을 이끌고 눈 덮힌 한라산 사고현장을 수색해준 대가로 고맙다는 소리 한 마디 듣지 못했다. 83년, 3장짜리 타올세트를 받은 게 끝이었다.

"최락도 특전사령관 명의로 수건 3장이 배달됐어요. 82년 2월 눈범벅이 된 한라산을 옆집 드나들듯 돌아다닌 저와 제 동료들이 함께 한장씩 나눠썼습니다. 그 뒤로 일체의 연락도 없었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 서재철 전 <제주신문> 기자는 82년 2월 7일 새벽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올라가 개미등 사고현장을 촬영했지만 당시 보도통제때문에 단 한 컷도 지면에 쓰지 못했다. 서 전 기자는 "89년엔가 민주화 바람이 분 뒤에야 이 사진을 지면에 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2] 서재철 <제주신문> 기자 "취재했지만 보도는 못 했던 그 사건"

2월 5일 제주 날씨는 매우 음산했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서재철 당시 <제주신문> 사진기자는 편집국을 요란하게 울리는 텔레타이프 소리에 맞춰 긴급 타전된 세 줄짜리 뉴스를 봤다. '공군 비행기 제주 훈련 중 추락-추자도 인근'. 1보가 떴다. 2보엔 '제주해역'으로 바뀌었다. 9시 저녁뉴스가 흘러나오는 TV 브라운관에도 마찬가지로 짧게 언급됐다.

지난달 28일 제주문예회관 휴게실에서 만난 서 전 기자는 82년 신군부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언론은 입이 있으되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술회했다.

서 전 기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제주 연두순시와 제주공항 준공식 행사의 근접취재권이 나와 아침부터 공항에서 대통령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미리 참석한 몇몇 장관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한라산을 수색했는데 아직도 못 찾았대?" "그래요."

전날 댕댕댕 편집국을 요란하게 울리던 텔레타이프 소리와 장관들의 말이 오버랩 됐다. '한라산이구나' 연두순시 등 '대통령 취재'를 마감한 서 전 기자는 6일 오후 회사에 들어가 보고했다.

"우리 고장에 이렇게 큰 사건이 발생했는데 안 갈 수 있나, 가야한다고 그랬죠. 회사에서는 모두 위험하다고 했어요. 당시엔 정말 그랬죠. 6일 해질녘 한라산 관음사 코스에서 양송남씨를 만났어요. 사고지점이 개미등 계곡이라는 것만 알려주고 조심하라고 했어요. 군인이 사방에 깔려있는 상황에서는 취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서 일단 철수하고, 인적이 뜸한 새벽에 올라가서 다시 촬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서 전 기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사고소식을 접하고 취재를 온 <경향신문> 기자들과 함께 7일 새벽 빙판길을 달음박질로 뛰어 올라갔다. 아라초등학교에 본부를 차린 수색대는 벌써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아수라장이었어요. 한쪽에 사체와 불발된 포탄들을 늘어놓은 걸 봤습니다. 시신이 어떤지 확인할 새도 없이 후닥닥 찍고 빨리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혹시라도 군인들과 마주칠까 두려웠죠. 등산객으로 가장해 사진 찍고 내려오는데 사고수습에 동원된 도청 공무원이 계속 '서 기자님, 이거 보도 못하는 줄 알죠? 보도하시며 안 됩니다' 그러는 거예요. 못들은 척 했지만 굉장히 거슬리는 소리였습니다."

서 전 기자는 흑백필름으로 총 6롤을 촬영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사진을 찍었지만 당시 그는 단 한 장의 사진도 지면에 쓸 수 없었다.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회사에 들어가 촬영한 내용을 보고하니 필름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뭔가 낌새가 이상해 5롤은 회사에 제출하고 1롤만 따로 갖고 있었죠. 나중에 어떻게 될 줄 모르니까요. 제가 제출한 필름 5롤은 몽땅 특전사에 넘겨졌더군요. 그 땐 뭐 다 그랬죠."

서 전 기자가 촬영한 당시 사고현장 사진은 민주화운동 바람이 분 뒤에나 쓸 수 있었다. <경향신문> 기자들도 이 사건에 대한 보도는 일체 하지 못했다. 서 전 기자는 전두환 정권 당시 보도통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모를 것이라며 입을 뗐다.

"82년 당시 군 관련 보도내용은 쓰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절대로 쓸 수 없었어요. 요즘 기자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그렇게 엄혹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89년인가 이 사건을 첫 보도하면서 '몇년만에 햇볕 본 사고현장' 이런 식으로 보도했던 것 같아요."

서 전 기자가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었다.

▲ 이재수씨가 원점비 부근에서 발견한 숟가락과 유품으로 보이는 시계줄 일부.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3] 마대자루에 담긴 시신을 보았다는 증언

82년 2월 7일 강석모(가명) 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관음사 매표소 근무를 서기 위해 출근했다. 평소와 다른 것은 군인들이 관음사 매표소 주변을 철통같이 둘러싸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던 것.

지난 1일 한라산 관음사 매표소에서 만난 강씨는 당시 일반인들은 이 사건의 현장에 가까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세히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먼 발치에서 시신더미가 마대자루에 실려 내려오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군인 2~3명당 한 자루씩 뭔가가 담긴 마대자루를 운반했어요. 뭐냐고 물었더니 '극비'라고 하면서 5일 날 사고 난 비행기에 탔던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래도 사람을 어떻게 마대자루에 담나, 아무리 군인이라지만 너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광목이나 붕대로 시신을 감쌀만한 여유나 상황이 안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강씨는 7일 하루 동안 군인들이 마대자루에 담긴 시신을 리어카로 운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2~3명의 군인들이 마대자루의 네 귀퉁이를 붙잡고 내려오는 식이었다. 군인들은 불에 탄 시신이 끔찍한 형상이라고 귀띔해줬지만 그는 그 말을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군인들이 며칠간 이 사고를 수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단 하루만에 무려 53명이나 사망한 큰 비행기사고를 후딱 해치우고 자리를 떴다. 7일 이후 강씨는 관음사 매표소 부근에서 군인들을 만나지 못했다.

"감히 사고현장에 가볼 엄두가 안 났죠. 하도 극비, 극비 해서 근처에 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개미등 계곡 인근에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한참 뒤에 우리 직원들끼리 궁금하니까 한번 가보자 해서 가봤는데, 눈이 녹아내리면서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시신토막을 볼 수 있었어요. 개미등 계곡에서 손가락 마디들을 본 기억이 또렷해요. 무척 끔찍했죠."

▲ 이재수씨가 82년 2월 5일 사망한 남동생 고 이재훈 준위를 위해 담배 스무 개비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재수씨와 <오마이뉴스> 취재진이 한라산 개미등 계곡의 한 부분을 파기 시작하자 채 1분도 안돼 사고기의 잔해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 장면4] 머리 뚜껑, 군화 신은 다리... 53인의 유골과 유품들

이재수씨는 스무 개의 담배가 모두 필터 끝까지 다 타들어가자 그제서야 노란 소국 한 다발을 싼 투명 비닐과 리본을 풀었다. 꽃대를 하나씩 풀어 원점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주변에 몰려든 까마귀들을 향해 먹을 것을 휘휘 돌렸다.

 
▲ 한라산에서 흔하게 마주치던 까마귀. 이재수씨는 한 마리의 까마귀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까마귀 떼는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라산에서 숨진 '검은 베레' 특전대원을 상징하듯 사람들을 따라다닌다며 허망하게 웃었다.

"여기 와 앉으면 금세 까마귀 떼가 몰려와요. 까마귀가 영물이라 음식냄새를 맡고 오는 것이겠지만 유족들은 혹시 저게 내 새끼 아닌가 하죠. 적송에 까마귀 떼가 시커멓게 앉으면 흠칫 놀랄 때가 있어요. 까마귀 떼가 사람 가까이로 저공비행을 하면 정말 무섭거든요."

까마귀 얘기를 하던 재수씨가 다시 고개를 떨구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25년이 지나도록 단 한번도 군 당국으로부터 비행기 사고의 원인에 대해 소상히 듣지 못했다며 가슴을 쳤다. 못난 누이가 좀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답답증은 해갈됐을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전두환정권은 당시 유족들에게 이 비행기 사고의 원인에 대해 성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당시 사고 원인을 추측할 뿐이지 구체적인 사고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게 유족들의 갑갑증이다.

이 사고 이후 100일 위령제를 지낼 때까지도 유족들에게 사고현장을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도 팽배하다. 군인들 몰래 유족끼리 가본 사고현장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100일이 지나도록 군 당국이 제대로 현장수습을 해놓지 않아 처참한 광경을 그대로 목격한 것이다.

재수씨는 "당시 군 당국은 큰 덩어리 위주로만 처리했다"며 "머리카락이 달린 사람의 머리뚜껑, 군화 신은 다리뼈 등의 유골, 수첩이나 시계 같은 유품들 등 여러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82년 근 한 해 동안 개미등 계곡에 비행기가 방치돼 있었어요. 제대로 수습하려고 했다면 헬리콥터를 띄워 바구니를 매달아 온전히 사건처리를 했을 거예요. 군 당국이 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만 했지 정상적으로 처리하지 않았어요. 그저 대충 눈에 띄는 것만 치우고 끝낸 거예요. 전두환정권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전두환 한명을 위해 젊은 군인 53명이 억울하게 죽은 거죠.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장윤선 기자

 
  
  정병주장군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1. 13:28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저항 하려다가
"자식" 같이 여기던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해 실패하고
강제예편을 당하게된 특전사령관 정병주 장군이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임자....모두 다불태워버리시오~~!
내 무슨 미련과 할말이있다고 그런것이 필요있겠소..그러나,군복한벌만은 남겨두시구려.."

그러자 의아하게 여기던 장군의 부인이 장군에게 물었다

"아니...장군...군복한벌은 왜 남겨놓으시라는겁니까?"

그러자,장군은 쓸쓸한미소로 부인에게 말씀하셨다

"만일,전쟁이 나게 된다면 조국은 나같은 늙은 군인의 힘도 필요하게될것이요....
그 군복은 그때 입을 옷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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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병주 장군은 육사 9기생으로,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과는 안동농고1년선후배사이기도하다

그는 특전사의 아버지란 별칭답게 매우 호방하며,의리있고 용맹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로
1967년 공수단을 맡기시작해 단급에 지나지않던 공수단을 한국군최고의 엘리트집단으로 키워낸
"특전사의 아버지"였다

그는 6.25한국동란 시절,
패배해 퇴각하던 연대의 잔여병력을 이끌고
"유격전"을 벌이는 등의 수없는 생사의 고비를 누볐고,

공수단에 배속되서는 낙하도중 낙하산이 펴지지않아 예비낙하산으로 불시착하는 큰사고를 당한후에도
부하들과 80여회에 이르는 강하훈련을 같이 할정도로 솔선수범하는 용감하며 전형적인 야전군인이었고,
자신이 키워낸 특전사에 대한 "명예"와 "애착"이 매우 강했다.

이처럼 그의 특전사에 대한 애착은 전두환,노태우,최세창,장기오 등등의 특전사후배들을
친자식저럼 여겨 그들에게 곤란한일이 생길때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곱지않은 시선을 감수하고라도 늘앞장서서 그들을 지켜주곤 하였는데,
그런 후배들이 자신에게 향하여 총구를 겨누었을때 그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하였겠는가.....

그의 헌신적인 "부하사랑"과 "절대적인 의리"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전두환이나 노태우등은 존재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는 그와 같이 반란군에 대항했던 장태완 수경사령관과는 달리
5.6공시절 아무런 자리에도 가지 않았고,초야에 묻혀 술로 울분을 달래다가
부하들의 반란을 막지못한 죄인이 무슨 할말이있겠느냐는 말로
스스로의 묘비명도 거부한채 쓸쓸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묘비명은 지금도 아무런 글귀가 써있지않다......

그는 아무런 할말 없다며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특전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영원한"특전사의 아버지"이며,

자존심있는 "참군인"이었다










특전사의 아버지 정병주사령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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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7추모관 건립을......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21. 11:41
작성자 : 자작나무 조회수 : 4716 추천수 : 2 다운횟수 : 0
(펌)전두환 경호 가다 몰사 당한 53명 "발설마라" 극비 붙여진 끔찍한 진실
네이트에서 퍼왔습니다..
기획기사라네요..
다시 한번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전두환 경호 가다 몰사 당한 53명 "발설마라" 극비 붙여진 끔찍한 진실

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무려 53명의 군인들이 전원 몰살한 이 사고는 이미 역사속에 묻혀졌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유족은 대부분 고인이 됐거나 연로하지만, 여전히 25년 전 사고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부터 취재해 온, 일명 '봉황새 작전'으로 불리는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처리 과정 등을 모두 4차례로 걸쳐 보도한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그만 파요. 이제 와서 뼛조각이 나온들 뭘 어쩌겠어요. 유족 두 번 죽이는 꼴 아니에요?"

고 이재훈 준위의 누이 재수(57)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감았다. 지난 1일 한라산 해발 1100m고지에서 류머티스관절염도 잊은 채 정신없이 25년 전 비행기 잔해와 유골을 찾던 그녀가 철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섞어 토해낸 말이다. 잊고 싶은 맘 반, 찾고 싶은 맘 반인 듯 싶었다.

일순간 정적이 감돌았고, 재수씨는 눈 안 가득 눈물을 머금고 먼 하늘과 맞닿은 제주바다를 응시했다. 반평생 가슴 속 응어리가 돼버린 한을 바닷물에 씻어내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날아든 한 마리의 까마귀가 적송 가지에 앉아 까악까악 울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누이에게 이 준위가 인사하는 듯 말이다.

이재훈 준위는 특전사령부 707대대 소속으로 82년 2월 5일 오후 1시 30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출발한 공군 수송기 C123기에 탑승했다. 제주 연두순시와 제주국제공항 준공식에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특전대원들을 미리 태워 출발시킨 항공기였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제주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한라산 중턱 개미등 계곡에 머리를 박고 추락했다. 이 사고로 53명의 군인(특전대원 47명, 공군 6명)들이 전원 사망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전쟁을 제외하고 평시 작전 중 군인들이 한꺼번에 몰살한 이 사건은 매우 큰 사건이었음에도 '단신' 거리로 취급됐다. 유족들은 지금도 이 사건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은 이 사건을 '제주 봉황새작전'으로 기억하고 있다.

"저것 봐요, 저것 봐. 이런 게 다 예사로 안 보인다니까."

재수씨가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분홍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밑에 흙이 껴 시커멓게 될 정도로 땅을 팠다. 판초우의, 랜딩기어 일부 조각, 안전벨트, 알루미늄 기체, 쇠사슬, 탄피, 천 조각…. 재수씨가 땅 밖으로 끌어올린 것은 25년 전 사고로 불에 탄 C123기 잔해들이었다.

한 뼘 길이의 나무막대기로 5㎝ 정도 팠을까, 흙에 섞여 부식된 사고기의 고철 덩어리를 찾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종이뭉치가 딱딱하게 굳은 것 같은 회백색의 항공기 잔해들은 마치 줄기에 달린 고구마가 무더기로 땅 속에서 끌려나오듯 그렇게 우르르 몰려 나왔다.

재수씨는 "개미등 계곡 사고현장을 정밀하게 조사하면 유골도 나올 것"이라며 "군 당국이 당시 사고를 얼마나 허술하게 수습했는지 아느냐"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 줌 재로 변한 남동생 죽음의 진실을 이제는 밝히고 싶다는 재수씨는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사고기가 머리를 박은 커다란 바위에 세워진 원점비. 재수씨는 원점비 앞에 종이컵을 놓고 소주를 콸콸콸 쏟아붓고, 평소 남동생이 사랑하던 담배를 스무 개비 올려 일일이 불을 붙였다. 담뱃불이 긴 꼬리표를 달고 하늘로 연기를 피워올리는 동안 재수씨는 낮은 톤의 목소리로 25년 전 사고현장 속으로 기자들을 안내했다.

82년 2월 2일부터 제주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당시 신문들은 모두 "제주에 북서풍 바람이 불고 가끔 흐리고 한때 눈이나 비가 내리겠다"는 기상예보를 연달아 보도했다. 지난달 28일 제주 한라산 영실매표소에서 만난 양송남(57·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씨도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눈이 참 많이 왔습니다. 날씨도 많이 흐렸고. 한라산엔 1m 높이의 눈이 쌓일 정도로 눈이 계속 왔어요. 사고 전날(4일) 밤 12시경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다음날(5일) 청와대에서 대통령 비서진들이 한라산 등반을 해야 하는데 안내자가 필요하니 좀 협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날도 이렇게 궂은데 무슨 한라산 등반인가 생각했지만 당시 청와대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어요. 힘이 셌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도저히 등산할 기상이 아니었어요."

양씨는 솔직히 불만이었다. 전문산악인이 아니면 등반하기 어려운 날씨에 권력을 내세워 등산로를 안내하라는 것은 '명령'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날씨 좋을 때 오시라고 권유할 형편도 못 됐다.

당시 등산로에는 입구에만 20㎝ 이상의 눈이 쌓일 정도로 상당한 눈이 내렸다. 일반인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당시에는 변변한 등산화도 든든한 오리털점퍼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안개가 짙게 깔리고 시야거리가 50m도 안 될 정도로 시계가 무척 안 좋아도, 등반은 해야 할 처지였다.

"6일 새벽 3시경 집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어요. 다짜고짜 용담1동 동사무소 앞으로 나오라는 거예요. 어디에 간다는 말도 없이 무조건 경찰트럭에 타라고 해서 탔죠. 차에 타보니 동료 2명이 동행했어요. 모두 4·3제주항쟁을 겪은 탓에 아무도 말하지 않고 20~30분 정도 달렸는데, 도착한 곳은 아라초등학교였습니다. 군인들이 교실에 커다란 군 작전지도를 걸어놓고 한라산 전체를 구역별로 나눠놓고 누가 어느 길로 갈지 정했습니다."

"흰 눈 위에 조각난 주검들이"

양송남씨는 50여명의 특전사 대원들과 함께 본부 수색대 안내를 맡았다. 나머지 두 명은 어리목 길과 성판악 코스를 안내했다. 하늘에서는 계속 공군 비행기가 웽웽 거렸고, 바다에는 해군 함정이 왔다 갔다 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몰려왔다.

"도대체 왜 별안간 군인들이 한라산에 떼를 지어 올라가야하는지 몰랐어요. 그냥 안내하라니까 안내했지, 군인들에게 감히 뭘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민간인은 나 포함 우리 직원 2명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모두 군인이었으니까요. 그날도 날씨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책임 인솔자는 최락도 소령, 그 사람이었어요."

관음사 입구를 출발해 산천단 검문소로 향했다. 도로는 빙판이었고 군인들이 탄 버스가 도랑에 빠졌다. 버스를 빼내지 못해 그 때부터 무조건 걷기 시작했다. 그 길에 공주사대 산악훈련팀을 만났는데 최 소령이 "어제 오후 3시경 산속에서 굉음을 듣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양씨는 그때서야 '사고로구나' 직감했다.

새벽 4시부터 걷기 시작해 낮 12시가 돼서야 탐라계곡 흙붉은오름 중간지대에 도착했다. 해발 1200m 고지였다. 점심식사로는 군인들이 짊어지고 올라온 쌀을 항고(코펠)에 넣고 눈을 퍼담아 지은 밥이 준비됐다.

그러던 오후 1시경 최 소령에게 무전이 왔다. 사고가 난 기체를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양씨와 최 소령, 군인들은 서둘러 방향을 돌려 오후 5시가 돼서야 개미등 계곡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울창한 숲의 나무들을 싹둑 잘랐더군요. 등산로에서 100m 정도 걸어들어가면 움푹 패인 골짜기가 나오는데, 거기 암반을 들이받은 사고현장은 무척 참혹했습니다. 시신이 갈기갈기 찢겨 있었죠. 최 소령이 군인들을 집합시켜놓고 업무를 나눴습니다. 시신 수습팀, 폭발물 꺼내는 팀 등으로 나눠 일에 착수하라고 했는데 군인들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머뭇머뭇 주저하니까 다시 재집합시키고 호통을 쳤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고 기체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주변에는 항공기 안에 실었던 물건과 조각난 사체들이 흰 눈 위에 널려 있었다.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주검은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그 때 최 소령이 양씨에게 다가왔다.

"민간인으로서는 처음 목격한 것이니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고 지금 이날까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쉬쉬하면서 살아왔지요."

양씨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당시 사고에 대해 떳떳하게 털어놓는다면서 말을 보탤 것도 없고 덜 것도 없이 당시 겪고 본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충혼비 앞에서 마주친 새색시와 타올세트

산에서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뒤 내려와 밤 9시 저녁뉴스를 보는데, TV엔 아주 짤막한 자막으로 '공군기 추락사고'라고만 언급돼 있어 의아했다. 정확한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지 일체 보도가 없었다. 다만, '작전 중 순직'이라는 짧은 멘트만 있었다고 기억했다. 양씨는 사고현장의 심각성에 비해 보도는 터무니없이 약소했다고 지적했다.

"그 당시 최 소령 얘기로는 특전사 군인 1명당 1억원 이상 돈이 들어갈 정도로 훈련이 잘 된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태평양 한 가운데 떨어뜨려놔도 살아나올 사람들이라고 말이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무참하게 사고를 당한 것은 당시 엄청난 눈보라에 안개가 잔뜩 끼는 등 기상이 안 좋은데 무리하게 비행기를 띄워 그런 게 아닌가 추측을 해봅니다. 시계가 안 좋으니까 조종사가 한라산을 공항으로 착각한 것 아닌가 이거죠."

양송남씨는 25년 전 '봉황새작전'으로 희생된 특전대원들을 생각하면서 가끔 충혼비를 찾는다.

재작년(2005년)에는 충혼비 앞에서 한 신혼부부와 마주쳤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새색시는 이 비행기 사고의 내력을 알아보고 싶다며 양씨에게 다가왔었다. 알고보니 이 C123기에 탑승했던 한 특전대원의 딸이다. 생후 6개월에 아버지를 잃은 딸은 아버지의 죽음에 의문이 많았던 게다. 양씨는 군 당국이 그를 위해서도 정확한 사고원인을 말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양씨는 25년 전 본부 수색대원을 이끌고 눈 덮힌 한라산 사고현장을 수색해준 대가로 고맙다는 소리 한 마디 듣지 못했다. 83년, 3장짜리 타올세트를 받은 게 끝이었다.

"박희도 특전사령관 명의로 수건 3장이 배달됐어요. 82년 2월 눈범벅이 된 한라산을 옆집 드나들듯 돌아다닌 저와 제 동료들이 함께 한장씩 나눠썼습니다. 그 뒤로 일체의 연락도 없었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월 5일 제주 날씨는 매우 음산했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서재철 당시 <제주신문> 사진기자는 편집국을 요란하게 울리는 텔레타이프 소리에 맞춰 긴급 타전된 세 줄짜리 뉴스를 봤다. '공군 비행기 제주 훈련 중 추락-추자도 인근'. 1보가 떴다. 2보엔 '제주해역'으로 바뀌었다. 9시 저녁뉴스가 흘러나오는 TV 브라운관에도 마찬가지로 짧게 언급됐다.

지난달 28일 제주문예회관 휴게실에서 만난 서 전 기자는 82년 신군부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언론은 입이 있으되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술회했다.

서 전 기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제주 연두순시와 제주공항 준공식 행사의 근접취재권이 나와 아침부터 공항에서 대통령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미리 참석한 몇몇 장관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한라산을 수색했는데 아직도 못 찾았대?" "그래요."

전날 댕댕댕 편집국을 요란하게 울리던 텔레타이프 소리와 장관들의 말이 오버랩 됐다. '한라산이구나' 연두순시 등 '대통령 취재'를 마감한 서 전 기자는 6일 오후 회사에 들어가 보고했다.

"우리 고장에 이렇게 큰 사건이 발생했는데 안 갈 수 있나, 가야한다고 그랬죠. 회사에서는 모두 위험하다고 했어요. 당시엔 정말 그랬죠. 6일 해질녘 한라산 관음사 코스에서 양송남씨를 만났어요. 사고지점이 개미등 계곡이라는 것만 알려주고 조심하라고 했어요. 군인이 사방에 깔려있는 상황에서는 취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서 일단 철수하고, 인적이 뜸한 새벽에 올라가서 다시 촬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서 전 기자는 서울에서 유일하게 사고소식을 접하고 취재를 온 <경향신문> 기자들과 함께 7일 새벽 빙판길을 달음박질로 뛰어 올라갔다. 아라초등학교에 본부를 차린 수색대는 벌써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아수라장이었어요. 한쪽에 사체와 불발된 포탄들을 늘어놓은 걸 봤습니다. 시신이 어떤지 확인할 새도 없이 후닥닥 찍고 빨리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혹시라도 군인들과 마주칠까 두려웠죠. 등산객으로 가장해 사진 찍고 내려오는데 사고수습에 동원된 도청 공무원이 계속 '서 기자님, 이거 보도 못하는 줄 알죠? 보도하시며 안 됩니다' 그러는 거예요. 못들은 척 했지만 굉장히 거슬리는 소리였습니다."

서 전 기자는 흑백필름으로 총 6롤을 촬영했다. 죽을 고생을 해서 사진을 찍었지만 당시 그는 단 한 장의 사진도 지면에 쓸 수 없었다.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회사에 들어가 촬영한 내용을 보고하니 필름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뭔가 낌새가 이상해 5롤은 회사에 제출하고 1롤만 따로 갖고 있었죠. 나중에 어떻게 될 줄 모르니까요. 제가 제출한 필름 5롤은 몽땅 특전사에 넘겨졌더군요. 그 땐 뭐 다 그랬죠."

서 전 기자가 촬영한 당시 사고현장 사진은 민주화운동 바람이 분 뒤에나 쓸 수 있었다. <경향신문> 기자들도 이 사건에 대한 보도는 일체 하지 못했다. 서 전 기자는 전두환 정권 당시 보도통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모를 것이라며 입을 뗐다.

"82년 당시 군 관련 보도내용은 쓰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절대로 쓸 수 없었어요. 요즘 기자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그렇게 엄혹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89년인가 이 사건을 첫 보도하면서 '몇년만에 햇볕 본 사고현장' 이런 식으로 보도했던 것 같아요."

서 전 기자가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었다.

82년 2월 7일 강석모(가명) 한라산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관음사 매표소 근무를 서기 위해 출근했다. 평소와 다른 것은 군인들이 관음사 매표소 주변을 철통같이 둘러싸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던 것.

지난 1일 한라산 관음사 매표소에서 만난 강씨는 당시 일반인들은 이 사건의 현장에 가까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세히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먼 발치에서 시신더미가 마대자루에 실려 내려오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군인 2~3명당 한 자루씩 뭔가가 담긴 마대자루를 운반했어요. 뭐냐고 물었더니 '극비'라고 하면서 5일 날 사고 난 비행기에 탔던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래도 사람을 어떻게 마대자루에 담나, 아무리 군인이라지만 너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광목이나 붕대로 시신을 감쌀만한 여유나 상황이 안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강씨는 7일 하루 동안 군인들이 마대자루에 담긴 시신을 리어카로 운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2~3명의 군인들이 마대자루의 네 귀퉁이를 붙잡고 내려오는 식이었다. 군인들은 불에 탄 시신이 끔찍한 형상이라고 귀띔해줬지만 그는 그 말을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군인들이 며칠간 이 사고를 수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 당국은 단 하루만에 무려 53명이나 사망한 큰 비행기사고를 후딱 해치우고 자리를 떴다. 7일 이후 강씨는 관음사 매표소 부근에서 군인들을 만나지 못했다.

"감히 사고현장에 가볼 엄두가 안 났죠. 하도 극비, 극비 해서 근처에 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개미등 계곡 인근에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한참 뒤에 우리 직원들끼리 궁금하니까 한번 가보자 해서 가봤는데, 눈이 녹아내리면서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시신토막을 볼 수 있었어요. 개미등 계곡에서 손가락 마디들을 본 기억이 또렷해요. 무척 끔찍했죠."

이재수씨는 스무 개의 담배가 모두 필터 끝까지 다 타들어가자 그제서야 노란 소국 한 다발을 싼 투명 비닐과 리본을 풀었다. 꽃대를 하나씩 풀어 원점비 앞에 가지런히 놓고 주변에 몰려든 까마귀들을 향해 먹을 것을 휘휘 돌렸다.



▲ 한라산에서 흔하게 마주치던 까마귀. 이재수씨는 한 마리의 까마귀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2007 오마이뉴스 김도균
까마귀 떼는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라산에서 숨진 '검은 베레' 특전대원을 상징하듯 사람들을 따라다닌다며 허망하게 웃었다.

"여기 와 앉으면 금세 까마귀 떼가 몰려와요. 까마귀가 영물이라 음식냄새를 맡고 오는 것이겠지만 유족들은 혹시 저게 내 새끼 아닌가 하죠. 적송에 까마귀 떼가 시커멓게 앉으면 흠칫 놀랄 때가 있어요. 까마귀 떼가 사람 가까이로 저공비행을 하면 정말 무섭거든요."

까마귀 얘기를 하던 재수씨가 다시 고개를 떨구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25년이 지나도록 단 한번도 군 당국으로부터 비행기 사고의 원인에 대해 소상히 듣지 못했다며 가슴을 쳤다. 못난 누이가 좀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답답증은 해갈됐을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전두환정권은 당시 유족들에게 이 비행기 사고의 원인에 대해 성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당시 사고 원인을 추측할 뿐이지 구체적인 사고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게 유족들의 갑갑증이다.

이 사고 이후 100일 위령제를 지낼 때까지도 유족들에게 사고현장을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도 팽배하다. 군인들 몰래 유족끼리 가본 사고현장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100일이 지나도록 군 당국이 제대로 현장수습을 해놓지 않아 처참한 광경을 그대로 목격한 것이다.

재수씨는 "당시 군 당국은 큰 덩어리 위주로만 처리했다"며 "머리카락이 달린 사람의 머리뚜껑, 군화 신은 다리뼈 등의 유골, 수첩이나 시계 같은 유품들 등 여러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82년 근 한 해 동안 개미등 계곡에 비행기가 방치돼 있었어요. 제대로 수습하려고 했다면 헬리콥터를 띄워 바구니를 매달아 온전히 사건처리를 했을 거예요. 군 당국이 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만 했지 정상적으로 처리하지 않았어요. 그저 대충 눈에 띄는 것만 치우고 끝낸 거예요. 전두환정권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전두환 한명을 위해 젊은 군인 53명이 억울하게 죽은 거죠.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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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영애여사 평생을 눈물로 살아오셨다.


온영애씨의 ‘특별한 설’···25년간 잔해 모은 특전사 유품함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0702161650271&nlv#c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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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경호수행중 순직하신 선배님들을 만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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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군 온영애여사와 구정때 충혼탑 방문

<작전중 숨진 특전대원 어머니의 특별한 설>
[연합뉴스] 2007-02-18 13:53
▲ 25년전 산화한 특전대원 그리는 모정

(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다른 사람들은 여기 유품이 단순히 비행기 조각으로만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우리 새끼들 시신 조각으로 보입니다" 25년전인 지난 1982년 2월 5일 대통령 경호작전중인 공군 수송기가 한라산 탐라계곡에 추락하면서 산화한 특전대원 시태일 상사의 어머니 온영애(73.서귀포시 동홍동)씨는 18일 오전 한라산국립공원 관음사관리사무소 충성공원에 마련된 수송기 유품함의 물기를 닦아내다 말고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온씨는 사고 이후 현재까지 매년 2월 5일과 현충일, 국군의 날, 추석, 설이 되면 충성공원을 찾고 있다.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 버린 그녀는 이날도 아들과 함께 산화한 특전대원과 공군 조종요원을 기리는 추모비 앞에 케이크와 빵 등 제물을 올리고 참배했다.

참사 당시 28살이었던 시 상사를 비롯한 제707특수임대대의 대원 47명과 공군 조종요원 6명은 제주를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 경호를 위한 '봉황새작전'이란 임무를 맡고 공군 C-123수송기에 탑승해 제주로 날아왔으나 악천후로 수송기가 추락해 모두 숨졌다.

당시 수송기가 추락하면서 대원들이 지니고 있던 수류탄과 폭약들도 함께 폭발해 형체를 알아 볼 수 있는 시신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합동수색대가 눈 쌓인 사고 현장을 수습하긴 했지만 잔해와 유품을 완벽하게 수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온씨는 청천벽력 같은 둘째 아들 시 상사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사고 전날 저녁 평소와 달리 '엄마, 보고 싶어 전화했어'라며 어리광을 부렸었는데 '침투훈련중 사망'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사실로 밝혀졌고 얼마뒤 사고 현장을 찾은 그녀는 눈 속에서 채 수습되지 않고 남아 있던 군화를 신은 다리와 시계를 끼고 있는 팔, 옷 조각 등을 수거하고 내려와 화장한 뒤 현재의 충성공원에 묻었다.

온씨는 "현장을 처음 본 순간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피가 얼어 붙는 것 같았다"며 "자식들 시신 조각이 짐승밥은 안되게 해야 할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잔해를 수습해 갖고 내려왔다"고 회상했다.

당시 교통부에 근무하던 그녀는 추모비가 세워질 때까지 5∼6차례 더 현장을 찾았으며 1986년 3월에는 직장을 그만 두고 가족들도 남겨둔 채 아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제주로 내려와 서귀포시의 한 호텔에서 10년간 일했다.

온씨는 1년 뒤 제주로 내려왔던 남편이 지난 1994년 세상을 뜨고 나서 현재까지 혼자서 생활하고 있지만 매 때마다 충성공원을 찾아 참배한 뒤 손수 만든 음식을 들고 인근의 특전사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특전사 장병들은 또 그런 온씨를 부대로 초청해 환갑잔치를 베풀고 백내장 수술비도 마련해 주는 등 그녀를 어머니처럼 모시고 있다.

특전사는 제주에서 훈련을 하는 특전대원들이 25년간 틈틈이 사고 현장에서 찾아낸 수송기 잔해를 모아 지난달 충성공원내에 유품함도 만들고 조금만 수송기 모델도 갔다 놓아 이곳을 찾는 등반객들에게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기릴 수 있도록 했다.

제주에 훈련을 오는 특전사 부대들은 항상 충성공원을 찾아 신고식을 겸한 추모행사를 갖는가 하면 현충일이나 국군의 날은 물론, 명절 때에도 빠짐없이 참배하고 있다.

함께 산화한 대원 모두가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온씨는 성당 미사때마다 적어내는 추모 대상자 명단에 아들 이름 대신 '53명 일동'이라고 쓴다.

khc@yna.co.kr (끝) <모바일로 보는 연합뉴스 7070 NATE/ⓝ/ez-i>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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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무슨일이?(펌)707과 훈련병 순직명단
1. 강동인 중사 80188590 1982-06-01 순직 45.홍영달 일병 13261405 1982-06-01 순직
2. 강재훈 일병 13249856 1982-06-01 순직
3. 고명수 중사 80191385 1982-06-01 순직
4. 김규성 일병 13261393 1982-06-01 순직
5. 김근식 일병 13261390 1982-06-01 순직
6. 김동권 일병 13261618 1982-06-01 순직
7. 김봉현 일병 13242954 1982-06-01 순직
8. 김상덕 일병 13261406 1982-06-01 순직
9. 김상수 일병 13248289 1982-06-01 순직
10. 김성훈 일병 13247753 1982-06-01 순직
11. 김영균 일병 13261392 1982-06-01 순직
12. 김영헌 일병 13241122 1982-06-01 순직
13. 김윤일 일병 13242953 1982-06-01 순직
14. 김정수 일병 13249861 1982-06-01 순직
15. 김정희 일병 13249687 1982-06-01 순직
16. 김종기 일병 13261398 1982-06-01 순직
17. 김형식 일병 13261397 1982-06-01 순직
18. 남기호 일병 13261402 1982-06-01 순직
19. 박상홍 일병 13248711 1982-06-01 순직
20. 박선기 일병 13261396 1982-06-01 순직
21. 박선우 일병 13242904 1982-06-01 순직
22. 박원섭 일병 13258053 1982-06-01 순직
23. 박윤서 대위 518789 1982-06-01 순직
24. 박철규 일병 13242565 1982-06-01 순직
25. 송철헌 일병 13261395 1982-06-01 순직
26. 위성수 일병 13251475 1982-06-01 순직
27. 이규학 상병 13169181 1982-06-01 순직
28. 이기연 일병 13258020 1982-06-01 순직
29. 이복노 대위 516306 1982-06-01 순직
30. 이상권 일병 13242908 1982-06-01 순직
31. 이상문 일병 13255437 1982-06-01 순직
32. 이상봉 일병 13261404 1982-06-01 순직
33. 이상학 일병 13261399 1982-06-01 순직
34. 이준재 일병 13242554 1982-06-01 순직
35. 이진우 일병 13253873 1982-06-01 순직
36. 이형주 일병 13261391 1982-06-01 순직
37. 이희일 일병 13250585 1982-06-01 순직
38. 장권옥 일병 13259049 1982-06-01 순직
39. 정구완 일병 13261401 1982-06-01 순직
40. 정치환 일병 13261400 1982-06-01 순직
41. 조정현 일병 13252355 1982-06-01 순직
42. 최규창 일병 13261394 1982-06-01 순직
43. 하상돈 일병 13253914 1982-06-01 순직
44. 홍병욱 일병 13242958 1982-06-01 순직
1. 강맹호 중사 80186157 1982-02-05 45. 황용운 상사 80186032 1982-02-05
2. 김말수 준위 308052 1982-02-05
3. 김봉기 상사 80181632 1982-02-05
4. 김영용 소령 509911 1982-02-05
5. 김영주 상사 80182788 1982-02-05
6. 김인현 중사 80188029 1982-02-05
7. 김준식 소령 515128 1982-02-05
8. 김판섭 상사 80176173 1982-02-05
9. 김학봉 소령 513609 1982-02-05
10. 김한철 상사 80180911 1982-02-05
11. 김형환 중사 80185106 1982-02-05
12. 민홍식 상사 80182079 1982-02-05
13. 박계연 상사 80179690 1982-02-05
14. 박성환 중사 80185331 1982-02-05
15. 박진수 준위 308054 1982-02-05
16.선우치관 상사 80184780 1982-02-05
17. 시태일 상사 80174179 1982-02-05
18. 신원환 상사 80181965 1982-02-05
19. 신준철 상사 80185110 1982-02-05
20. 심길섭 상사 80184193 1982-02-05
21. 심재영 중사 80186390 1982-02-05
22. 양선모 중사 80188785 1982-02-05
23. 엄기정 중사 84064234 1982-02-05
24. 여은수 상사 80184405 1982-02-05
25. 우찬민 상사 80181720 1982-02-05
26. 윤덕상 중사 89015678 1982-02-05
27. 이금숙 상사 80184258 1982-02-05
28. 이민호 상사 80183200 1982-02-05
29. 이영우 중사 80184545 1982-02-05
30. 이용대 상사 80180911 1982-02-05
31. 이을석 중사 80186332 1982-02-05
32. 이재훈 준위 308053 1982-02-05
33. 이주영 상사 80186097 1982-02-05
34. 이진기 소령 515237 1982-02-05
35. 이창규 대위 518417 1982-02-05
36. 임홍선 상사 80186155 1982-02-05
37. 장희주 중사 80186347 1982-02-05
38. 전태익 상사 80184071 1982-02-05
39. 정용환 중사 80186392 1982-02-05
40. 정치수 상사 80184259 1982-02-05
41. 천성목 상사 80171805 1982-02-05
42. 표현복 상사 80173582 1982-02-05
43. 함창규 상사 80184811 1982-02-05
44. 허창훈 상사 80179839 1982-02-05
1982년도에 일어난 사고입니다... 곧 군시절 동기녀석 기일이 다가오는지라 국립현충원 홈피 묘역검색중에
눈에 띄는 부분이 있어 정리해 보았더니 모두 같은해에 두번에 걸쳐 순직처리가 되어 있는겁니다. 한두분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숫자라 안타깝고 궁금하여 특전님들께 자문을 구합니다. 사망지역이 성남과 제주도 이더군요. 아마도 공수교육중 항공기사고인듯 보여집니다만... 제가 특전인도 아니고 짬차이도 나는터라 아는게 없네요.. 위에 올린 고인들의 존함과 군번이 문제가 된다면 곧 삭제 하도록 하겠습니다.
특전중사 기억안나님 방갑습니다! 위 순직하신 분들은 제주도 경호경비임무 중 순직 하신분들과 그해 공수기본교육 강하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순직 하신분들입니다. 저중엔 저랑 같이 입대한 동기들도 있고 같은 내무반에서 뒹굴던 전우들도 있습니다. 정말 부르고 싶고 보고싶은 전우들 이름에 눈물이........2007-03-04
nsct 707요원들이 제주도에서 추락한 사고입니다.2007-03-04
기억안나 아........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국가에 큰 재산이셨던 분들이 너무도 허무하게 생을 달리 하셨군요.. 몰랐습니다... 지금이라도 고인들의 명복을 빌겠습니다.2007-03-04
특전맨 1982년 6월 1일 순직한 분들 중에 저의 동문도 있습니다. 공수 교육중 기본 강하하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순직 했습니다. 비행기 기종은 C-123 입니다. 저는 공수교육 261기 입니다.2007-03-04
특전중사 특전맨님 방갑습니다! 저들 사고후 C-123 탈려면 다리가 후들후들 했던 기억이.....2007-03-04
쟈칼 707요원들이라면 우리나라 아니 세계 최정예의 전사들인데...2007-03-04
황금소나무 10기생분 군번이 많이 보이네요...인현이는 탈렌트해도 될 만큼 미남이고 3대 독자였습니다. 항상 먼저 조국의 선봉에 선 특전사 출신임을 감사 드리며...영현들의 평안함을 빕니다.2007-03-04
그레이 기막힌 일이지요 한해에 100여명의 특수부대 요원이 하늘에서 산화하다니 새파란 이병(추서 일병)에서 영관장교까지 그리고 교육단 교관들도 숨지고 707 1개 지역대가 몽땅 사라지고 참 어이상실...유구무언..고인들께 명복을 빕니다.2007-03-04
찢어진 워커 그레이선배님 나오셨습니까? 휴일 잘 지내셨는지요?2007-03-04
황금소나무 미군들~~ 우리에게 장비 제대로 팔지 않았습니다. PRC77 9999개 체널 저쪽애들은 다 가지고 있었지요....쌈 붙인거 아니면...아직도 그 생각하면 .....특공연대 생긴이유가.... 절대 우방도 없고 절대 적도 없다는......냉혹한 현실입니다2007-03-04
그레이 예 워커님 비가 하루종일 내리는군요. 2007-03-04
찢어진 워커 황금소나무님 전에 하번 뵌적이 있었는데 인사드립니다..그레이선배님 전 다시 생업으로~2007-03-04
특전중사 그레이님 나오셨습니까? 이곳은 지금도 제법 비가 내립니다! 황금 소나무님 방갑습니다.주파수에 대해선 제가 좀 아는데요 통달거리가 짧은 관계로 지역에 따라 전군이 중복 사용 합니다! 어떤대대가 어느지역으로 훈련은 가면 그지역 주파수를 할당 받아 배정을 하죠! 어떤땐(T/S등) 미군의 전자전(전파방해)을 실시 하면 그지역 무전기 전부 통화 불능입니다.참 위에 10기생 군번이 많이 보인다고 했는데 어떻게 아는지요? 2007-03-04
황금소나무 제군번이 바로 밑 군번이거든요......정작 폭파, 회기, 통신, 의무 순으로 교육단에서 군번 배여 했는데...인현이는 의무라서 시험 성적이 떨어진 관계로 저 보다 군번 수령이 늦었습니다. m 50 ,헬기도 돌려 돌려 수출한 사실 아시는지요? 못믿을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2007-03-04
특전중사 그레이님 비도 추룩추룩 오고 오늘 정월대보름인데 귀밝기 술이라도 한잔 하심이....2007-03-04
황금소나무 네 접수 되었습니다 연락 올리겠습니다.2007-03-04
특전중사 네~~! 그럼 위에 멜주소 지우겠습니다2007-03-04
twin 특전중사님이 맞습니다. 2월은 707 대대가 전대통령 제주 경호위해 가다난 사고이고요 6월사고는 교육단 공수교육중 난 사고입니다. 그때 먼저간 후배의 생전 모습과 그 부모님들이 잊혀지지않습니다.2007-03-04
빠진골병 최규창일병! 그넘 군대갔다가 훈련 중 사고로 순직했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가끔씩 술한잔 나누던 친구였는데....... 눈도 내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오늘 아침에 이 곳에서 그넘의 이름을 보니 활짝 웃던 모습이 괜시리 생각나네요.2007-03-05
켈베도스 707이었나 난 사령부 소속인줄 알고 있는뎅...제주도에 추락한건2007-03-06

ManChu 당시 신문기사에는 무슨 작전중 사고로 전원 순직 이라고 난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뒤 5공 청문회때 한번 거론 된거로 기억하고요. 얼마전 이 특전방에 상세한 글이 올라와 정확한 사실을 알게되었죠. 참 가슴 아픈 일이죠. 707,그 막강한 전력을 허망하게 잃다니... 돌아가신 분들께 삼가 조의를 드립니다...2007-03-14
하늘아래첫동네 말을 할려구해두 못하구 뭐 4.3을 격으셨다구 햇는데.. 정말 격으신것인지두 궁금하고 (57세라면은 4.3 이랑은 거의 무관한 나이)장난하는것두 아니고.............. 2007-03-14
ManChu 하늘아래 첫동네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까전엔 님의 댓글이 저보다 위에있었는데 갑자기 삭제 되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 했었는데......2007-03-14
백학산 당시 비행단장이 우리나라에 펜텀기를 처음 몰고온 전도가 양양한 분(강모 전의원의 형님)이셨는데 기상악화로 이륙을 금지하고 퇴근을 했는데 일직사령이 청와대 경호실의 지시를 받고 이륙을 시켜 사고가 나자 비행단장에게 책임을 물어 예편을 시켰다 합니다.2007-03-14
aza 대한민국 군인의 최고정예인 특전사를 위해서라도 특전 출신의 예비역이나 특전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모여 사고현장에 대한 수습절차를 가지도록 해야 함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5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말이죠. 그리고 조국을 위해 밤낮없이 고생하시다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조치가 이래선 안된다고 봅니다. 말로만 조국과 국민을 운운하기 이전에 정책적인 면이 뒤따라야지 그렇지 않으면 정치인들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선전물로 전락할 뿐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조국을 위해 말없이 고생만 하시다가 가신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2007-03-14
blue용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지만 지금 이렇게 밝혀졌고 그에대한 진실이 규명됐으면 이를 인정하고 그 당시 억울한 원혼들을 위로해 주어야 하는건 당연한것 아닌가요...정치인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전모씨와 그 당시 이 사건을 은폐했던 모든이들 지금이라도 이분들에 한맺힌 원혼을 위로해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사고시 돌아가신 모든분들이 하늘에서 편히 쉬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07-03-14
조종수 예전에 경찰 대선배가 이작전에서 친형님이 순직하셔서 전두환대통령이 뭐가하고싶냐고 물어보길래 경찰이되고싶다고해서 특채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있습니다.....2007-03-14



 
  
  충혼비 건립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4. 18:46

전국의 특전동지회 여러분!!!
1982년6월1일을 기억하십니까?

이날은 공수 250기수가 C-123를 타고 낙하중, 청계산에
추락해,탑승한 53명 전원이 사망한날입니다.

이들을 위로하고자 청계산 중턱에 충혼비를 건립하였으나
이들의 부모님들이 이제는 연로하셔서 청계산까지 올라갈수
가없어, 교육단에 충혼비이전을 오래전부터 건의하였던 사항
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교육단에서 해결하고자,수차례 육군본부에
건의하여 이제사 승인이난 사항입니다.

그러나 충혼비건립에 많은 예산이 부족함을 알은 광주특전
동지회원들은 십시일반 특별회비 및 후원금을 각출하여
특전교육단장에게 기금을 전달하게되었습니다.

현재 교육단에서는 2006년6월1일 충혼비건립기공식에 맞쳐서
공사에 박차를가하고있습니다.

대한민국특전동지회 여러분!!!
공수낙하훈련중 사망한 이들에게 마음속으로나마
겸허한 마음으로 위로의 묵념의 시간을 가져보는것이
어떠할까요?

 
  
  한라산 추락 특전사장병 추모식서 온영애씨 눈물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4. 17:33
한라산 추락 특전사 장병 추모식서 온영애씨 눈물

”하늘 가도 아들 볼 면목 생겼구나”
 
한라산 추락 특전사 장병 추모식서 온영애씨 눈물

“아들아, 하늘에 가도 너를 볼 면목이 생겼구나.”

1982년 2월 5일 대통령 경호를 위해 제주로 오던 중 수송기가 한라산에 추락, 꽃다운 나이에 순직한 특전사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제25기 추모식이 5일 관음사광장 충혼공원 특전사위령탑에서 열렸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특전훈(訓)이 새겨진 위령탑 뒤편에 마련된 유품함을 깨끗한 천으로 닦고 있던 온영애씨(73·여)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온씨는 둘째 아들인 특전사 707대원 고(故) 시태일 상사(당시 28세)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시신을 찾으러 한라산에 오르기도 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오열했던 온씨는 1986년 서울의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에 홀로 내려왔다. 그리고 호텔에서 일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의 넋을 기렸다.

이날 추모식이 더 남다른 이유는 온씨의 소원이 해결됐기 때문이다. 당시`아들`잃은`온씨는 특전사 부대가 한라산에 훈련을 올 때마다 유품이나 잔해가 보이면 찾아 달라고 간청했다.

대원들은 추락지점 인근 땅 속에 묻혀 있던 유품들을 하나 둘씩 모아왔다.

그리고 특전사령부는 지난달 1일 이 유품을 담은 유품함을 위령탑 뒤편에 설치했다. 또 1994년 퇴역한 추락기인 C123수송기 모형도 설치했다.

특전사 관계자는 “수송기가 추락한 후 대원들이 지니고 있던 탄약과 수류탄이 동시에 폭발하면서 시신마저 확인하기 어려웠다”며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신과 기체 잔해가 함께 흩어졌다”고 말했다.

온씨는 “당시 내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며 “유품함에 있는 기체 잔해들은 내 아들의 살과 피가 묻어 있는 시신이나 다름없다”며 천으로 유품함을 닦으며 쓰다듬었다.

온씨는 이어 “한라산에 흩어져 남아 있던 잔해들이 이제야 한 자리에 모이게 돼 하늘에 가도 아들을 볼 면목이 생겼다”며 “유품함을 볼 때마다 사고 전날 전화로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한 아들의 목소리가 떠오른다”며 울먹였다.

한편 사고 직후 발표된 ‘침투훈련 중 사망’은 세월이 흘러 대통령 경호 임무인 ‘봉황새작전’으로 밝혀졌으며, 추모비에는 김용영 육군 소령 등 특전사 부대원 47명과 공군 부대원 6명의 이름이 새겨져 넋을 기리고 있다. / [제주일보 2007-02-06 ]  

 
  
  이 어머니의 한을 어떻게 할것인가?  +   [대테러/707. 5,18 . 4,3사건]   |  2007. 3. 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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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장군이 707 들어가기 1년 전에 참사가 일어났다 

1년 전에 들어갔으면 내 어머니 모습이다고   생각하면은
저승에서 얼마나 안타까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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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경호 수행 중 순직하신 선배님들을 만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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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영애 여사와 구정 때 충혼탑 방문

<작전중 숨진 특전대원 어머니의 특별한 설>
[연합뉴스] 2007-02-18 13:53
▲ 25년전 산화한 특전대원 그리는 모정

(제주=연합뉴스) 김호천 기자 = "다른 사람들은 여기 유품이 단순히 비행기 조각으로만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우리 새끼들 시신 조각으로 보입니다" 25년전인 지난 1982년 2월 5일 대통령 경호작전중인 공군 수송기가 한라산 탐라계곡에 추락하면서 산화한 특전대원 시태일 상사의 어머니 온영애(73.서귀포시 동홍동)씨는 18일 오전 한라산국립공원 관음사관리사무소 충성공원에 마련된 수송기 유품함의 물기를 닦아내다 말고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온씨는 사고 이후 현재까지 매년 2월 5일과 현충일, 국군의 날, 추석, 설이 되면 충성공원을 찾고 있다.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 버린 그녀는 이날도 아들과 함께 산화한 특전대원과 공군 조종요원을 기리는 추모비 앞에 케이크와 빵 등 제물을 올리고 참배했다.

참사 당시 28살이었던 시 상사를 비롯한 제707특수임대대의 대원 47명과 공군 조종요원 6명은 제주를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 경호를 위한 '봉황새작전'이란 임무를 맡고 공군 C-123수송기에 탑승해 제주로 날아왔으나 악천후로 수송기가 추락해 모두 숨졌다.

당시 수송기가 추락하면서 대원들이 지니고 있던 수류탄과 폭약들도 함께 폭발해 형체를 알아 볼 수 있는 시신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합동수색대가 눈 쌓인 사고 현장을 수습하긴 했지만 잔해와 유품을 완벽하게 수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온씨는 청천벽력 같은 둘째 아들 시 상사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사고 전날 저녁 평소와 달리 '엄마, 보고 싶어 전화했어'라며 어리광을 부렸었는데 '침투훈련중 사망'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고는 사실로 밝혀졌고 얼마뒤 사고 현장을 찾은 그녀는 눈 속에서 채 수습되지 않고 남아 있던 군화를 신은 다리와 시계를 끼고 있는 팔, 옷 조각 등을 수거하고 내려와 화장한 뒤 현재의 충성공원에 묻었다.

온씨는 "현장을 처음 본 순간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피가 얼어 붙는 것 같았다"며 "자식들 시신 조각이 짐승밥은 안되게 해야 할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잔해를 수습해 갖고 내려왔다"고 회상했다.

당시 교통부에 근무하던 그녀는 추모비가 세워질 때까지 5∼6차례 더 현장을 찾았으며 1986년 3월에는 직장을 그만 두고 가족들도 남겨둔 채 아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제주로 내려와 서귀포시의 한 호텔에서 10년간 일했다.

온씨는 1년 뒤 제주로 내려왔던 남편이 지난 1994년 세상을 뜨고 나서 현재까지 혼자서 생활하고 있지만 매 때마다 충성공원을 찾아 참배한 뒤 손수 만든 음식을 들고 인근의 특전사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특전사 장병들은 또 그런 온씨를 부대로 초청해 환갑잔치를 베풀고 백내장 수술비도 마련해 주는 등 그녀를 어머니처럼 모시고 있다.

특전사는 제주에서 훈련을 하는 특전대원들이 25년간 틈틈이 사고 현장에서 찾아낸 수송기 잔해를 모아 지난달 충성공원내에 유품함도 만들고 조금만 수송기 모델도 갔다 놓아 이곳을 찾는 등반객들에게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기릴 수 있도록 했다.

제주에 훈련을 오는 특전사 부대들은 항상 충성공원을 찾아 신고식을 겸한 추모행사를 갖는가 하면 현충일이나 국군의 날은 물론, 명절 때에도 빠짐없이 참배하고 있다.

함께 산화한 대원 모두가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온씨는 성당 미사때마다 적어내는 추모 대상자 명단에 아들 이름 대신 '53명 일동'이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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