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 에 유대인 학살을 추모하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다. 일년에 수백만명이 왔다간다. 규모는 우리나라 초등학교보다 적다. 그런데 이 건물을 들어갔다 나온 모든 사람들은 눈에 눈물자국을 다 갖고 나온다. 나치의 학살과 유대인의 비극적 삶을 그 작은 건물 안에 모두 다 기록하고 형상화 시켜 역사를 현재로 재생해서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생각하지 않고 모두 유대인의 비극적인 역사를 공유하며 슬픔과 분노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25년 전 5.18민중항쟁의 현장이었던 광주 속 기념물들은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동시장 사적지 표지석 부근에서 만난 한 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 5.18민중항쟁 표지석. 양동시장.
“광주는 무능 하제 잉. 여그 와봤자 5.18이 뭔지도 몰라붕께 무능한 것이제. 그때 어렸던 학생들이나 한 두 살 먹었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김밥 싸고 주먹밥 만들고 집집마다 밥 맨들어서 시민군 트럭에다 갖다 날렀는지 뭣으로 알것소. 아, 사진 때기 하나라도 놔두면 훨씬 낫 제. 그때 사진 하나라도 설치하믄 백번 말이나 글이 뭔 필요하것소. 답답해브러. 글로 표시된 비석마저 저 공중 전화박스 옆에다가 천으로 저렇게 덮어 있으믄 뭣인지 알것냐고. 안된당께 광주는. 뭣이 빛의 도시여 도시는, 껌껌한 도시제.”
“뭣이 빛의 도시여, 껌껌한 도시제”
▲ 도청 부근.
항쟁의 중심공간인 도청의 경우도 양동과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학습을 통해서 5.18을 배워야 하는 고등학생들에게 사적지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래는 고등학생과 나눈 대화다. “애들아 이 비석 같은 게 뭔지 알겠니?” “아니요, 모르겠는데요.” “몇 학년?” "고 2예요. 5.18에 대해 학교에서 배웠는데요. 근데 어디서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몰라요. 이곳이 5.18 때 유명한 도청 앞인지 아저씨가 말항께 쬐금 알겠네요. 저렇게 분수대만 달랑 있으믄 뭣을 알겠어요. 뭔가 조각이든지 동상이든지 그때 사진이든지 있어야제 여기가 유명한디구나 하고 한번 이라도 더 생각하고 이곳이 5.18 일어나고 광주 시민들 엄청나게 고생한디구나 하고 알제 이렇게 생겼는데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어떻게 뭣으로 알겠어요!”
▲ 주남마을 입구.
광주-화순간 국도변에 있는 ‘주남마을 학살 표지석’은 그 존재 자체가 무의미했다. 시속 80킬로 이상 달리다가 표지석을 보기 위해 멈춰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주차공간을 마련하던가, 아니면 이곳 상황에 맞는 조각이나 사진, 혹은 형상화된 상징물을 세우는 게 더 타당할 듯싶다. 실제로 마을에서 만난 한 촌로는 “우리 동네는 5.18 비석이 없다”고 단정하기까지 했다. 촌로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다. 추상화된 구조물에 깨알 같은 글씨로 표시해뒀으니 그게 5.18비석인줄 어떻게 알겠는가.
5.18민중항쟁 표지석 대부분 “모른다”
항쟁의 진원지인 전남대학교, 그리고 숱한 시민들이 고통을 당한 조선대학교에서도 표지석은 무용지물이었다. 전남대, 조선대에서 대학생.시민과 나눈 대화를 순서대로 적었다.
▲ 전남대 정문.
▲ 조선대학교 “몇 학년 이세요?” “전남대 1학년이예요.” “이곳이 5.18 첫 격돌이 일어난 곳인줄 아세요? “네.” “그럼 저기 보이는 표지석이 무언줄 아세요?” “아니요.” “아주머님 전대 자주 산책하세요?” “네.” “저 비석같은게 무언지 아세요?” “아니요.” “5.18 표지석인데요.”
“아 네에. 근데 왜 저렇게 안 보인데다 세워뒀단가요. 이쪽 정문에다 놔두면 훨씬 잘 보이고 좋을텐데...” “돈이 아깝네요. 유심히 쳐다보지 않고서는 이것이 5.18을 나타내는 표지석이라 누가 생 각하겠어요. 사진은 고통스러우니까 조형물이라도 착 보면 바로 알 수 있게 해서 그날을 기려야 하지 않나요. 비용이 아깝네요. 다시 말하지만 지나가다 누가 이게 5.18 표지석이라 알겠어요. 글자도 잘 안보이는데.”
(조선대에서 만난 시민, 이하 학생) “이 표지석 무언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실례지만 몇 학년이세요?” “3학년이예요.” “말씀 해주셔서 고마워요.”
상무관, YWCA, 농성광장 격전지, 광목간 양민 학살지 등등 한번 어디에 있나 살펴보면 우린 어떤 심정이 들까 한다. 그리고 그 주변을 걷는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게 무엇인줄 혹시 아세요 하고 물어보면 한결같은 답이 나올 것이다.
“모르겠는데요”
표지석 모두를 살피고 난 뒤에 말로 설명하기엔 힘든 그 무언가가 숨막히도록 가슴을 내리 눌렀다. 다름 아니라 국가폭력의 야수적 만행과 살육에 맞서 온몸으로 싸우다가 산화했던 광주, 기억과 재생으로 반드시 계승 승화돼 민주 인권 정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공동체의 활화산으로 부활할 5.18을 웅변하고 있는 이 모든 현장에 표지석 외엔 어떤 조형물도 형상물도 사진 한 장도 없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기억’하고 어떻게 ‘재생’한다는 말인가
▲ 배고픈 다리 부근.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시력 2.0이어도 알아볼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씨만 쓰여 있는 저 표지석. 근현대 한국사회의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5.18의 현장이 이렇게 표지석 하나로만 버텨내며 더욱이 온갖 것에 둘러싸여 마냥 이렇게 서 있다는 것은 기가 막힌 통증이었다.
죽음과 피와 눈물과 노래와 함성과 땀과 영혼의 깊은 고뇌와 비겁과 도망과 회한과 나눔과 연대와 해방의 공동체와 미래사회의 한 가능성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는 금남로에 서보자. 그 어디에 80년 5월, 그 역사의 기억과 재생이 담겨있다고 느껴지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한번 겨울바람 부는 유동을 지나 누문로에 몸을 싣고 도청 분수대로 걸어보자. “없다.” 80년 5월을 상징하는 그 어떤 조각도 사진도 형상도 “없다.”
왜 금남로에는 국적불명의 나신과 형이상학적인 조각상만 서 있는 걸까. 아마도 두려운가보다. 그날을 상징하고 재생시키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게 두려운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 무거워서일까. 맨 얼굴의 5월을 대면하기가 너무나 무거운 것일까. 그날 죽은 영혼들의 외침이 너무나 버거운 것일까.
▲ 광주교도소 앞.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제껏 5월 관련 사업에 들어갔던 예산이 얼마인데, ‘5월의 기억과 재생 그리고 미러가 생생히 되살아 날 역사의 현장들이 이렇게 까지 방치되고 왜곡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유대인 대학살은 미국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유럽에서 자행된 학살이었다. 그들은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던 곳에 기념관을 세워 많은 것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기억과 재생 능력이 부럽다. 불과 25년 전의 역사 현장도 재생시키지 못한, 그래서 기억에서 조차 가물거리게 만드는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추신: 이 사진과 기사가 게재되면 표지석 정비니, 관리니 하면서 양동 포장마차나 학동 옷 노점상의 생존권이 바로 타격을 입지나 않을까라는 고민이 있다. 기사의 본뜻과 전혀 다르게 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상황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