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새해벽두에 노무현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새해에는 서민 여러분의 형편이 한결 나아질 수 있도록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밝히고, “그동안 우리의 발목을 잡아왔던 큰 문제들은 이제 대강 정리된 것 같아, 올해에는 좀더 차분하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새해맞이의 자신감을 밝혔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해찬 국무총리 역시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 “정부는 올해 양극화 해소, 고령화 대책에 주력할 것”이라며 “경기가 활성화 되고 있어 국민이 골고루 따뜻한 온기를 느낄 시점이 멀지 않았다”고 말해 노무현대통령의 신년사를 뒷받침했습니다.
참여정부의 국정운영방침이 발표된 그 이튿날, 국립5.18묘지를 찾았습니다. 새해를 맞아 마음가짐도 하고 오랫동안 찾아가지 못했던 5.18구묘역에 자리잡은 열사들의 묘도 참배할겸 해서입니다. 80~90년대 야만의 시절 때에는 자주 찾아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곳이기도 해서 사뭇 각별했습니다.
▲ 눈이불을 뒤집어 쓴 듯 음산한 5.18구묘역. 깃대에 태극기가 힘없이 걸려 있습니다.
먼저 구묘역을 가보았습니다. 눈은 아직 녹지 않았습니다. 마치 눈이불을 뒤집어 쓴 듯 고요하기만 합니다. 빛바랜 태극기가 힘없이 걸려있습니다. 눈은 치워지지도 않았는지 발목까지 빠져들고 병술년 ‘개띠’라서인지 개발자욱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 병술년 개띠해입니다. 눈덮힌 묘역에 개 발자욱이 선명합니다.
무명열사와 민주열사의 묘비에는 아직도 붉은 띠가 동여매져 있습니다. 아침나절인데도 스산하기만 합니다.
▲ 80년 5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했던 박관현열사의 묘도 보입니다.(신묘역 이장)
80년 5월 속에 광주시민과 시민군은 손수레와 청소차에 실려 이 곳에 묻히고, 그 뒤 지독했던 야만의 시절에 의문의 죽임을 당해서, 또는 제몸을 스스로 불살라 제단에 몸을 바친 민족민주열사들이 묻여있는 이 곳은 한 때 광주정신을 웅변하던 민주화의 성지였던 곳입니다.
▲ 조선대교지 "민주조선" 창간호에 북한의 혁명과 건설, 미제침략사 등을 실어 국가보안법에 연루, 수배를 받다 의문의 주검으로 돌아온 이철규열사의 묘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몇몇 뜻있는 사람들만 이 곳을 기억하며 다녀간 듯 한산하기만 합니다. 막걸리를 마시며 약해질세라 마음세우며 목놓아 울던 이 곳은 지금 어쩌면 천덕꾸러기처럼 방치되어 있는 듯 합니다.
▲ 눈에 파묻힌 무명열사의 묘비.
열사들의 묘를 둘러보고 신묘역을 향했습니다. 그런대로 빙판눈길도 잘 치워져 있고 추모의 노래소리가 들립니다. 100여명의 군중이 추모하러 가는 대열이 눈에 들어옵니다.
▲ 1백여명의 무리들이 5.18신묘역 참배단을 향하고 있습니다.
따라가 보니 열린우리당 광주전남시도당 당직자들이 지역 국회의원들과 함께 새해참배를 하러 가는 대열입니다. 가보니 장엄한 추모곡이 울려 퍼지고 참배가 시작됩니다. 참배단에는 노무현대통령과 이해찬총리, 김원기 국회의장의 추모화환이 서있고 민주당의 대표화환도 함께 있습니다.
▲ 자세히 보니 열린우리당 지역국회의원과 당직자들이 참배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 ‘열린우리당 당직자일동’의 화환이 놓입니다. ‘대표’들의 화환 옆에 ‘일동’이라는 표현이 사뭇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웅장한 추념의 탑과 가지런이 정비된 신묘역, 국립 5.18묘지는 구묘역과는 확연히 달라보입니다.
▲ 노무현대통령과 이해찬 국무총리의 추모화환이 보입니다.가운데 서있는 사람은 박경순 5.18국립묘지관리사무소장
신묘역은 구묘역으로터 탄생된 것입니다. 갑자기 ‘조강지처’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공원같은 신묘역과 음산해보이는 구묘역! 아마도 조강지처는 구묘역같은데 조강지처는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곳에는 아직도 오늘의 참여정부가 있기까지 자신의 청춘과 온몸을 던진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인데도 5.18의 직접적인 관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너무 가혹한 것일까요?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 수많은 추모객들이 이 곳 5.18국립묘지(신묘역) "민주의문"을 거칩니다. 5.18구묘역에도 민주의 새해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것도 어쩌면 우리가 말하는 ‘양극화’일까요? 양극화해소에 집중하겠다는 참여정부의 국정운영방침이 발표된 그 이튿날, 5․18묘역에도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숙제가 남아있음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